대법원 2002도537판결의 의미와 검사의 입증책임(상)
대법원 2002도537판결의 의미와 검사의 입증책임(상)
  • 기사출고 2004.12.31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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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승 교수]
1992년 6월23일 대법원이 이른바 신이십세기파 사건에서 한국판 미란다원칙(대판 92도682 판결)을 잉태시킨 이후 오랜만에 형사증거법사에서 피고인의 인권보장에 기여할 것으로 기록될 또 하나의 판결을 선고하였다. 2004년 12월6일에 나온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주○○ 등에 대한 상고심 판결인 2002도537 판결이 그것이다.

◇최영승 교수
지금까지 그 증거능력을 인정함에 있어서 법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영역에서 거의 무제한하게 보장을 받아오던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피고인이 공판정에서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하여 그 형식적 진정성립을 인정하면 곧바로 조서의 실질적 진정성립까지 추정하던 단순 도식의 인정을 거부한 것이다.

형사소송법은 312조 1항에서 검사가 피의자 또는 피의자 아닌 자의 진술을 기재한 조서는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원진술자의 진술에 의하여 그 성립의 진정함이 인정된 때에는 증거로 할 수 있다고 하고, 나아가 단서 조항을 두어 검사작성의 피고인이 된 피의자의 신문조서에 대하여는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이하 ‘특신상태’라 함)하에서 행하여진 때에 한하여 그 피고인이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에 불구하고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단서 조항은 피고인이 수사과정에서의 형식적 진정성립 및 실질적 진정성립은 인정하나, 공판정에서 그 내용을 피의자신문조서와 다르게 진술하는 경우에 특히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이로써 312조 1항 본문 및 단서를 통할하여 해석할 때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가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조건은 일반적 요건인 성립의 진정함 외에 특별한 요건인 특신상태의 존재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립의 진정함에 대하여 대법원은 조서의 형식적 진정성립뿐만 아니라 실질적 진정성립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보고 있으며, 형식적 진정성립이 인정되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실질적 진정성립도 인정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관된 태도였다.(대판 2001. 6. 29. 2001도1049, 1998. 6. 9. 98도980 등) 특신상태에 대하여는 성립의 진정함이 인정되면 피고인의 특별한 반증이 없는 한 추정하고 있는 태도를 보여오고 있다.(대판 1987. 9. 8. 87도1507, 1986. 11. 25. 83도1718 등)

이렇게 하여 대법원의 판결을 통하여 형식적 진정성립에 터잡은 이른바 단계적 추정론(형식적 진정성립 인정 → 실질적 진정성립 추정 → 특신상태 추정)이라는 우리 형사절차상의 기이한 증거법 논리가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이는 형식적 진정성립으로부터 특신상태까지를 추정하도록 함으로써 피고인에게 증거법상의 입증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권위주의 형사절차의 잔재로 볼 수 있다.

다행히 대법원이 공판중심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그 스스로의 오랜 유물인 종래의 단계적 추정론을 단절시킨 점은 형사증거법사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뿐만 아니라 형식적 진정성립이 기초하고 있는 형사소송법 244조 2항,3항의 조서의 열람 및 변경청구권이 제대로 행사되었는지 그리고 간인 및 서명날인 등이 충분히 임의로 이루어졌는지 그 자체가 의문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판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로써 우리의 형사사법 50년사에서 형사사법이 한층 더 성숙할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판결로 이후 당장 피고인이 공판정에서 피의자신문조서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기재되었다고 이를 부인하는 경우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는 그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는 형식적 진정성립에도 불구하고 312조 본문의 실질적 진정성립이 전제되지 않고는 특별한 증거능력 요건으로 이해되는 단서조항의 특신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무의미할 따름인 것이다.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된 이래로 312조 1항의 특신상태가 문제되어 증거능력이 부인된 경우는 지금까지 고작 3~4건에 불과하였다는 사실은 결국 312조 1항의 규정이 법원의 판결에 의하여 그 진정한 의미회복의 기회가 방치되어 온 것이나 다름없다. 법원이 겉으로는 구두변론주의니 공판중심주의니 하는 19세기 이후로 끊임없이 제기되어 오고 있는 이념을 부르짖으면서도 실상은 이를 유기한 채 검사의 조서에 의존하여 재판을 진행해 온 셈이다.

그러나 법원만 탓할 수 없는 것이 이 조항의 탄생시기인 1961년은 5.16혁명 직후의 군사정권 시대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개인의 존엄보다는 전체의 가치가 우선시되던 시기로 피의자보다는 국가목적을 오히려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입법자마저도 단순하게 서명날인이라는 형식적 진정성립만 인정되면 당시의 권위주의적 신문행태 및 재판관행으로 보아 모두 증거능력으로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음직 하다.

어쨌든 지금까지 법원의 보호아래 증거능력에 무임승차하던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가 대법원의 원조중단 선언으로 이제는 사법경찰관의 피의자신문조서와 마찬가지의 지위로 전락하게 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대법원이 단계적 추정론의 제1단계인 형식적 진정성립 단계에서 제2단계인 실질적 진정성립으로 발전하는 과정의 추정력을 단절시킴으로써 이제는 특신상태도 무의미해지고, 다만 검사로 하여금 피의자신문조서 내용이 사실과 다르게 기재되었다는 피고인의 공판정에서의 주장에 대한 입증의 책임만 남겨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경찰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를 검사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거나 혹은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를 경찰의 수준으로 내리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당사자주의 소송구조에서의 검사를 피고인과 대등한 한 당사자로 보고 ‘공판정에서’ ‘당사자의 구두에 의한 주장과 입증에 의하여’ ‘법관이 직접’ 그 진실을 가리겠다는 의지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즉 위 판결은 형사소송법 312조 1항에 대한 대법원의 새로운 해석으로 형사증거법에 있어서 피의자의 인권보장과 공판중심주의의 요청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법원의 의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경원대학교 법정대학 겸임교수(법학박사) 겸 본지 편집위원(everpine2002@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