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재합의 위반시 손해배상청구 가부에 대한 비교법적 고찰
중재합의 위반시 손해배상청구 가부에 대한 비교법적 고찰
  • 기사출고 2021.03.29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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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거래법학회 신년학술대회 지상중계

국제거래법학회(회장 이영석)가 3월 19일 Zoom을 통한 웨비나로 2021년 신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법무법인 피터앤김의 한민오, 유은경 변호사가 "중재합의 위반시 손해배상청구 가부에 대한 비교법적 고찰-독일과 영국의 최근 판례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발표하고, 현재 Freshfields  Bruckhaus Deringer 싱가포르 사무소에 파견 나가 있는 법무법인 광장의 김새미 변호사가 토론자로 참가했다. 또 제2주제로는 UNCITRAL의 박이세 변호사가 "스위스 개정 국제중재법(국제사법 제12장)의 우리 중재법과의 비교와 입법론적 시사점"에 대해 발표하고, 법무법인 율촌의 박현아 변호사가 토론했다. 제1주제 발표와 토론 내용을 소개한다.

I. 서론

최근 다수의 국제거래계약에 중재합의가 포함되고 중재합의가 실무에서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중재합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특정국가법원에서 소를 제기한 경우, 이로 인하여 상대방은 시간적, 금전적 손해를 입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손해에 대한 배상청구가 가능한지의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자세히 분석되지 않았다. 일방 당사자가 유효한 중재합의에 위반하여 소를 제기한 경우, 상대방이 그로 인하여 지출한 비용 등에 관하여 중재합의 위반 당사자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논의의 편의상 주된 계약의 준거법이 중재합의의 준거법과 일치한다고 상정하고, 이에 대해 고찰해보려고 한다.

II. 영국법 하에서의 논의

영국법에서는 중재합의 및 그로부터 파생되는 당사자의 권리 및 의무가 계약적(contractual)인 성격을 가진다고 본다. 즉, 중재합의란 본질적으로 분쟁의 해결을 위한 계약에 해당하거나 그 일부를 구성한다고 설명한다. 같은 맥락에서, 중재합의란 "각 당사자가 중재인의 판정을 준수하고, 그 판정을 이행할 것을 묵시적으로 확약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해를 토대로, 영국 판례(Turner v Grovit [2001] House of Lords)에서는 중재합의로부터 "법원소송절차를 피할 권리(right to avoid court proceedings)" 혹은 "제소되지 않을 계약적 권리(contractual right not to be sued)"가 발생하며, 계약 상대방에게 "이러한 권리를 강제할 정당한 이익(legitimate interest in enforcing that right against the other party to the contract)"이 있다고 본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3월 19일 열린 국제거래법학회 신년학술대회에 참가한 이종혁 교수, 한민오, 박현아, 김새미 변호사. 신년학술대회는 웨비나로 진행되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3월 19일 열린 국제거래법학회 신년학술대회에 참가한 이종혁 교수, 한민오, 박현아, 김새미 변호사. 신년학술대회는 웨비나로 진행되었다.

영국에서는 중재합의에 위반한 제소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다. 즉, 중재합의가 다른 여느 계약과 마찬가지로 강제력 있는(enforceable) 계약이라는 기본적 이해에서 출발하여, 그 계약의 위반이 있을 경우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를 긍정한 판례도 다수 존재한다. 다만, 중재합의 위반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되기 위해서는 (i)중재합의를 규율하는 준거법상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여야 하고, (ii)손해의 발생에 대한 입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손해배상이 반드시 별도 손해배상청구에 관한 소 제기 및 이에 대한 판단의 형태로 인정되기보다는, 비용부담에 관한 판결 내지 판정의 형태로 인정될 수 있다는 점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중재합의 위반 시 당사자는 외국에서 소송을 방어하는 데 발생한 합리적인 비용을 손해배상으로 청구할 수 있다. 최근에는 중재합의나 기타 분쟁해결합의를 위반한 당사자의 손해배상책임을 계약서에 명시하거나 손해배상의 예정을 하기도 한다.

프 법원 판결에 중재 신청

대표적인 판례로 CMA CGM SA v. Hyundai Mipo Dockyard Ltd. (2008) 사건이 있다. 사안의 개요를 보면,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프랑스 마르세유 상업법원에서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구체적으로, 원고는 피고가 4개의 운송계약의 경개(novation)에 부당하게 합의해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 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여 피고에게 (i)손해배상금으로 미화 3,646,125달러 및 10,000유로의 배상, 그리고 (ii)30,000유로 상당의 비용 부담을 명하였다. 이에 피고는 4개의 운송계약에 포함된 중재합의에 따라 원고를 상대로 영국을 중재지로 한 중재를 신청하였다. 이 중재사건에서 피고는 프랑스 법원 소송이 중재합의에 반하여 제기되었으며 따라서 피고는 프랑스 법원 판결금 액수 상당의 손해를 배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재사건의 중재판정부는 피고의 청구를 받아들여 원고에게 피고의 손해를 배상할 것을 명하였다. 구체적으로 중재판정부는 (i) 프랑스 법원 판결로 인해 피고가 원고에게 지급한 판결금, (ii)lost management time 및 프랑스 소송에서 지출한 법률비용, 그리고 (iii)이자의 배상을 명하였다. 이에 원고는 1996년 영국 중재법 제69조에 따라 항소(appeal)를 제기하였다.

영 법원, 원고 항소 기각

영국 법원은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였다. 이 판결에서 특히 쟁점이 된 것은 중재사건의 중재판정부가 브뤼셀 I 규정 제32조, 제33조에 따라 (다른 유럽연합 회원국인) 프랑스 법원 판결을 승인(recognize)할 의무가 있는지 여부였다. 이에 대해 영국 법원은 브뤼셀 I 규정이 중재판정부에는 효력을 미치지 않으므로 프랑스 법원 판결을 승인할 의무가 없다고 판시하였다. 결국 영국 법원은 중재합의 위반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을 수긍하였다.

한편 대상판결이 내려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사법재판소(ECJ)에서 회원국(영국)의 법원이 다른 회원국(이탈리아)에서의 소송절차가 중재합의를 위반하는 것이라는 근거로 소송유지명령(anti-suit injunction)을 발하는 것은 브뤼셀체제와 양립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다(West Tankers 판결). 이 West Tankers 판결이 앞에 소개한 CMA 판결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는지 여부가 문제되는데, 그렇지 않다고 보인다. CMA 판결은 중재합의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대한 것인 반면, West Tankers 판결은 중재합의 위반을 이유로 영국 법원이 발한 소송유지명령에 대한 것이므로, 두 판결은 근본적으로 다른 주제에 관해 논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West Tankers 판결에 의해 유럽연합의 다른 회원국을 상대로는 소송유지명령을 통해 중재합의의 실효성을 보장하는 영국 법원의 능력이 박탈된 만큼, 손해배상이 더 실효성 있는 구제수단으로서 대두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III. 독일법 하에서의 논의

독일의 경우, 전통적으로는 학설상 중재합의의 법적 성질을 소송계약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였다. 즉, 통설은 소송법적 효력 외에 실체법적 효력을 부정하였다. 한편 독일 연방대법원은 중재합의를 소송법적 효력을 가지는 실체법적 계약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내려진 독일 연방대법원 판결에 의해 기존의 논의에 현격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즉, (아래에서 보다 자세히 살피는 바와 같이) 독일 연방대법원은 국제재판관할합의의 성격이 "절차적 측면에 관한 실체법적 계약"이라고 판시하였는바, 이러한 판시는 중재합의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즉, 독일 연방대법원은 중재합의 및 관할합의의 실체법적 효력을 부정하는 전통적인 견해와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였다.

관할합의 위반 소에 배상책임 인정

독일법 하에서의 전통적인 견해는 중재합의로부터 실체법적 효력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손해배상청구도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최신 독일 연방대법원 판례는 일방 당사자가 국제재판관할합의를 위반하여 소를 제기한 사안에서 상대방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인정하였다. 이러한 판단 내용은 중재합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대륙법계 국가이므로 손해배상청구 시 '과실' 문제도 검토가 필요하다고 보인다(예컨대 중재합의가 무효라고 정당하게 믿은 경우–특히 중재합의에 반하여 소제기를 하였는데 그 전에 변호사의 자문을 받은 경우).

최신 독일 연방대법원 판례에서는, 일방 당사자의 국제재판관할합의 위반으로 제기된 소송에서 상대방 당사자가 지출한 합리적인 수준의 변호사비용을 손해로 인정하였다.

대표적 판례로 BGH, Decision dated 17 October 2019, III ZR 42/19이 있다. 사안의 원고와 피고는 둘 다 대규모 통신회사인데, 원고는 미국 워싱턴 DC, 피고는 독일 본(Bonn)에 각각 소재하고 있었다. 당사자들은 서로의 데이터를 수신하고 이를 위해 필요한 전송 용량을 마련할 것을 약정하는 계약을 체결하였는바, 해당 계약에서는 준거법이 독일법, 관할은 독일 본 지방법원이라고 규정되었다. 이후 원고를 위한 전송 용량 증가에 관한 협상이 실패하자, 원고는 피고가 추가 전송 용량을 마련할 것을 구하는 소송을 미국 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미국 지방법원은 관할이 없다는 이유로 해당 소송을 기각/각하(dismiss)하였지만, 비용 부담에 관해서는 판단하지 않았다. 그러자 원고는 독일 본 지방법원에 동일한 소를 다시 제기하였는데, 이에 피고는 미국 지방법원에서 원고의 소를 방어하기 위해 지출한 변호사비용 USD 196,118.03 상당의 배상을 구하는 반소를 제기하였다.

1심 법원인 본 지방법원은 원고의 본소는 기각하고, 피고의 반소를 인용하였다. 원고가 항소하자, 2심 법원인 쾰른(Cologne) 항소법원은 피고의 반소를 기각하였다. 이에 피고는 독일 연방대법원에 상고하였다.

"관할합의는 실체법적 계약"

연방대법원은 2심 법원의 판결을 파기하고, 피고가 미국 지방법원에서의 소송절차에서 지출한 비용을 손해로 청구할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우선 연방대법원은 관할합의의 성격이 "절차적 측면에 관한 실체법적 계약"이라고 판시하였다. 이로써 연방대법원은 관할합의 내지 중재합의를 단순 소송법적 계약으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부정하였다. 이어 연방대법원은 당사자들이 관할합의(본 지방법원) 및 준거법 합의(독일법)를 함으로써, 실체적 및 절차적 측면에 있어서 최대한의 예측가능성을 확보하려고 했음을 지적하였다. 즉, 당사자들은 분쟁 발생 시 수반될 경제적 리스크를 가늠할 수 있게 하고, forum shopping이나 관할에 관한 복잡한 이견을 방지하기 위하여 법적 안정성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연방대법원은 이러한 법적 안정성이 충분히 보장되기 위해서는 관할합의 위반으로 비용을 지출한 당사자가 그 비용을 보전받아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이러한 비용 보전이 가능하려면, 관할합의 위반시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관할합의를 해석하는 수밖에 없다고 연방대법원은 결론 내렸다. 연방대법원은 (i)당사자가 계약의 준거법을 독일법으로 정한 이상, 관할합의 준수와 같은 부수적 의무 위반의 경우에도 당사자가 손해배상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점을 용인했고, (ii)당사자가 본 지방법원을 합의관할로 정한 이상 독일 민사소송법상 패소 당사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원칙을 용인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이 판례에는 '적어도 외국 법원에서 관할이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경우'라는 단서가 설시되어 있어서, 외국 법원에서 (독일 법원 관할합의에도 불구하고) 관할이 있다고 보는 경우에도 관할합의 위반자의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연방대법원은 독일 민법 제280조 제1항 및 당사자 간의 관할합의에 의거하여, 당사자가 관할합의 위반으로 제기된 외국 법원에서의 소송에서 자신을 적절히 방어하기 위해 지출한 합리적인 수준의 변호사비용을 손해배상으로 구할 권리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변호사비용에는 (해당 외국 법원에서 적용되는 법상 합리적인 수준에 해당하는 이상) 관할 등 본안 외 문제와 관련된 비용(외국 법원에 관할권이 있는지 법률 검토를 받기 위하여 지출한 변호사 자문비용)이 포함된다고 하였다.

구제수단으로 손해배상청구 긍정

위와 같은 독일 연방대법원 판결의 태도는, 중재합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 현재 주류적 견해라고 보인다. 특히 독일 법원이 관할합의 또는 중재합의 위반에 대한 구제수단으로 소송유지명령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 반면, 손해배상청구는 구제수단으로서 명시적으로 긍정했다는 점에서 위 판결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 다만, 위 판결에서 독일 연방대법원이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해야 하는 근거 중 하나로 독일 민사소송법상 '패소자 부담의 원칙'이 규정되어 있는데, 당사자들이 관할합의 시 이러한 원칙의 적용에 대한 보호 가치 있는 기대가 있었다고 본 점이 주목할만 하다. 이와 같은 판시를 중재합의의 경우에 적용하면, 중재합의 자체의 내용 외에 중재합의에 편입된 중재규칙, 그리고 중재합의에 따라 정해지는 중재지법 또는 중재절차의 준거법이 비용 보전의 문제에 관해 어떻게 규율하는지가 중재합의의 해석 및 손해배상책임의 인정 여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시사한다.

IV. 한국법 하에서의 논의

중재합의의 법적 성격에 대하여, 한국의 다수설은 "절차법적 법률관계에 관한 실체법(사법)상의 계약", "소송상의 관계에 대한 실체법상의 계약", 또는 "소송법적 효과를 수반하는 특수한 사법상의 계약"이라고 본다. 이 점에 관한 판례의 태도는 불분명하며 아직 명시적으로 다룬 판례는 없다고 보인다. 참고로, 관할합의의 성격에 관해서는 주로 "관할의 발생이라는 소송법상의 효과를 낳는 소송행위로서 소송계약의 일종"이라고 보고 있어, 중재합의의 법적 성격에 대한 다수설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생각건대, 중재합의는 관할합의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할 것이나, 한편 중재절차를 관통하는 가장 기본적인 관념은 사적 자치의 원칙이며, 중재절차가 법원 재판절차에 비해 더욱 강력한 당사자자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재합의에 실체법적 성격과 효력을 인정할 필요성은 관할합의의 경우보다 더 크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재합의 위반시 손해배상청구 가부와 관련, 긍정설은 중재합의의 당사자들은 중재합의를 이행할 의무, 즉 중재절차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고 촉진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를 하고, 중재인의 판정 또는 기타 분쟁의 해결을 위태롭게 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실체법상의 의무를 부담하므로, 일방 당사자가 중재합의의 이행을 거부하면 상대방은 의무 위반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의무 vs 소송상 부담

반면 부정설은 위와 같은 협력의무는 엄밀하게는 '의무'가 아니라, 소송상 필요하기는 하나 그 행위를 할 것인지 여부는 당사자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소송상의 부담'일 뿐이라고 한다. 중재합의의 성격을 "절차법적 법률관계에 관한 실체법상의 계약"으로 본다면, 중재합의로부터 해당 합의를 이행할 실체법상의 의무가 도출된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자연스럽다. 이러한 실체법상의 의무를 인정한다면, 일방 당사자가 중재합의의 이행을 거부하여 의무 위반이 발생할 경우 상대방 당사자는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계약의 준거법이 한국법일 경우, 계약 당사자는 부수적 의무 위반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질 수 있다는 점을 용인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살피건대, 중재합의가 절차법적 법률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법원이나 중재판정부가 자유재량으로 변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그런 점에서 순수하게 절차적 성질의 합의만은 아니라고 보이고), 오히려 이는 양 계약 당사자의 합의인데 다른 계약조항과 달리 취급할 논리적 이유가 없고, 계약상 의무에 조건이 붙어 있더라도 여전히 이는 계약상 의무이다. 즉, 분쟁이 발생한 경우에만 중재합의가 trigger 된다고 보더라도 당사자의 행위를 규율하는 '의무' 조항이라고 볼 수 있다.

소송유지 가처분 가부

중재합의 위반을 이유로 (소송유지)가처분을 할 수 있는지 분명치 않으나,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결론이 달라지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가처분 요건을 갖추지 못하더라도 여전히 실체법상 의무는 수반될 수 있다고 사료된다. 한국 민사집행법상 보전처분의 형식으로 소송유지명령을 발령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i)피보전권리, (ii)보전의 필요성 등 요건이 충족되어야 하고, (국제재판)관할권도 인정되어야 한다. 우선 한국이 중재지인 경우, 소송유지명령에 대해 한국 법원의 국제재판관할권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 국제사법 제2조의 해석 등에 비추어볼 때 민사집행법 제303조에 따라 한국 법원에 본안의 관할권이 있거나 다툼의 대상이 한국에 있는 경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보전소송에 대한 국제재판관할이 인정된다고 볼 것인데, 중재지가 한국이라는 점을 이유로 한국의 국제재판관할을 긍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분명치 않고 이견의 여지가 있다. 다만, 현실적 필요성을 고려하면 중재지가 한국이므로 국제사법 제2조에 따라 한국이 실질적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유력한 견해가 있다.

만약 중재합의로부터 해당 합의를 이행할 실체법상의 의무가 도출된다고 본다면, 피보전권리의 존재는 인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견해의 대립이 있다. 중재합의 위반의 경우에 법원이 중재법 제9조에 따라 소를 각하하도록 되어 있는 등 다른 절차로 해결할 수 있는 규정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다. 반면 비록 다른 대응수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회복하기 어려운 실질적 피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보전의 필요성이 긍정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결국 한국에서 소송유지가처분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불명확한 부분이 있고, 이 부분이 입법론적으로 명확하게 정리된 것도 아니다. 다만, 국제재판관할의 존재 또는 보전의 필요성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아 소송유지가처분은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피보전권리의 요건과 연결되는 실체법상 의무는 얼마든지 인정될 수 있다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소송유지가처분의 허용 여부와 손해배상청구의 인정 여부 사이에 반드시 논리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한국 민법의 기본적인 태도에 따라 '과실', '손해', 그리고 '인과관계'는 입증이 되어야 손해배상청구가 인정된다고 할 것이다. 참고로 아직 한국에서는 견해의 대립이 있으므로, 손해배상청구가 인정된다는 점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한 실무적인 방안으로서 계약에 중재합의 위반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명기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손해배상액의 예정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재합의 위반 시 손해의 범위

중재합의 위반 시의 손해와 관련,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차액설에 의하여 손해를 판단하고 상당인과관계 있는 손해를 인정하는바, 중재합의 위반 시에도 마찬가지의 기준으로 손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손해는, (i)중재합의를 위반하여 제기된 소송을 방어하는 데 지출된 합리적인 비용과, (ii)그 소송에서 부담한 소송비용일 것이다. 중재합의의 위반이 있지 않았더라면 해당 비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외의 손해도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될 수 있다면 위반 당사자를 상대로 청구할 수 있을 것이다.

중재합의를 위반하여 진행된 소송에서 발생한 손해 항목에는 (i)해당 소송을 직접 담당한 변호사의 보수 외에도 (ii)기타 전문가의 자문을 받기 위해 지출한 비용, (iii)해당 소송에 출석해서 소송을 방어하는 데 지출한 숙박비 · 교통비, (iv)소송에 의한 명성 · 위신의 손상에 대한 위자료 등 다양한 항목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중 거래관념 또는 경험칙에 비추어 통상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항목은 통상손해로 판단되어 전액 배상이 가능할 것이다. 반면 해당 소송의 개별적 · 구체적 사정에 따라 발생했다고 여겨지는 항목은 특별손해로서 예견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배상범위에 포함될 것이다.

발생된 비용의 액수나 과다 역시 손해배상의 범위를 판단하는 데 있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중재합의를 위반하여 진행된 소송에서 발생한 변호사비용이 해당 국가 변호사들의 통상적인 요율이나 보수 수준에 비추어보았을 때 합리적인 수준이거나, 관련 당사자의 사내 변호사보수 산정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해당 비용은 통상손해에 해당한다고 인정될 여지가 높을 것이다. 반면 지출된 변호사비용의 액수가 변호사보수 산정기준 등 제반 사정에 비해 현저히 과다하다면, 이는 통상손해의 범주를 벗어난 특별손해로 판단될 여지가 있다고 보인다.

한편 한국과 같이 일정한 범위의 변호사보수를 소송비용으로 산입하여 그 보전을 인정해주는 법제들이 있는데, 이러한 법규의 기준에 따라 산입되는 금액까지만 통상손해로 볼 수 있는 것인지 문제될 수 있다. 생각건대, 법정의 기준에 따른 변호사보수와 실제 발생한 변호사보수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 있고, 법정의 기준을 초과한 액수의 변호사보수도 거래관념 또는 경험칙에 비추었을 때 통상적인 수준에 해당한다고 여겨질 수 있다. 즉, 법정의 기준을 초과한 액수의 변호사보수도 반드시 특별손해라고 볼 것은 아니고, 통상손해에 포함되는 것으로 인정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중재합의를 위반하여 제기된 소송에서 법원이 (한국에서의 소송비용확정결정과 같이) 법정의 기준에 따라 비용에 관한 결정을 내렸다면, 해당 금액은 손익상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통상손해에 해당한다고 판단되는 변호사보수에서 법원의 비용에 관한 결정을 통해 상환받은 부분을 제외한 금액이 실제 손해배상으로 인정될 것이다.

중재합의의 효력 범위

관련 문제로, 중재합의의 효력 범위에 (중재합의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중재합의의 구체적 문언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중재합의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를 어느 절차를 통해 청구하는지의 문제와 연관된다. 중재합의의 효력 범위에 손해배상청구가 포함된다면 중재판정부가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고 볼 여지가 많은 반면, 그렇지 않다면 중재절차가 아닌 다른 법원 재판절차에서 손해배상청구를 다루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는 기본적으로 중재합의의 해석 문제이겠으나, 대체로 중재합의의 효력 범위에 중재합의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청구도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당사자의 의사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해석일 것이다. 중재합의 속에 해당 계약을 둘러싼 제반 분쟁을 법원 재판에 의하지 아니하고 중재절차에 의해 해결하려고 의욕하는 당사자의 의사가 반영되어 있는 만큼, 중재합의의 위반에 따른 분쟁 역시 (달리 보아야 할 특별한 사정이 없는 이상) 중재절차에서 해결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V. 결론

과거에는 독일과 같은 대륙법계 국가의 경우, 중재합의나 관할합의가 당사자들이 체결한 다른 계약과는 구별되는 소송법적 효력을 지닌 소송계약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이에 중재합의의 주된 효력은 소송법의 영역에서 발생한다고 보았고, 실체법상의 의무 및 이에 따른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데에는 회의적인 시각이 강했다. 그러나 중재합의도 단순 소송법적 효력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합의를 이행할 실체법상의 의무가 도출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중재합의 위반시 다른 여느 계약과 마찬가지로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이는 중재합의의 효력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독일 연방대법원 판례가 보여주듯이, 독일 역시 중재합의를 소송계약이라고 보는 전통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중재합의 위반 시 손해배상책임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한국법 하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민오 · 유은경 변호사(법무법인 피터앤김, minohan@peterandk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