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침체로 한국 로펌업계의 성장세가 주춤하면서 전문성을 갖춘 대형 로펌 출신 변호사들의 홀로서기가 이어지고 있다. 종래에도 대형 로펌에서 활동하던 변호사들이 별도의 법률사무소를 열어 독립하는 경우가 간간이 있었으나, 최근엔 하나의 추세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로펌 변호사들의 부티크 설립이 줄을 잇고 있다.
박상열, 오관석 변호사 2차 분화
지난해 3월 박상열, 권국현 변호사 등 김앤장 출신의 중견 변호사 4명이 '모두를 이롭게 하겠다'는 의미의 '법률사무소 이제(利諸)' 간판을 내걸고 새로운 법률서비스를 시작했다. 이제는 그 후 김앤장 출신의 합류가 이어지며 파트너가 8명까지 늘어났으나 올 들어 환경 및 M&A 전문의 박상열 변호사와 소송 전문가로 유명한 오관석 변호사가 이제를 떠나 또 다른 중소 법률사무소를 차려 독립하는 등 또 한 번의 변화가 있었다. 2월 말 현재 이제는 권국현, 김관하, 유정훈, 남현수, 김동원, 이도형 변호사 등 각기 분야가 다른 6명의 파트너가 이끌고 있다.
뜨거운 여름을 지나 지난해 가을로 접어들자 대형 로펌 변호사들의 법률사무소 설립이 한층 붐을 이루었다. 법무법인 세종 국제중재팀의 팀장, 부팀장 등으로 활약하던 김범수, 이은녕 변호사와 김준민 뉴욕주 변호사, M&A 전문의 이성훈 변호사 등 4명이 10월 초 법무법인 KL 파트너스로 독립한 데 이어 같은 세종 출신인 이승재, 김재하, 김원국, 이승진 변호사가 법무법인 리앤킴을 열어 스타트업 기업과 부동산 거래 등에 대한 자문을 표방했다.
기현, 기업분쟁 등 겨냥
비슷한 무렵 서울 강남에 개인사무소를 연 기업소송전문 신필종 변호사는 올 초 같은 김앤장 출신의 이현철, 정한진, 김선우 변호사 등이 가세하며 법무법인 기현을 출범시켰다. 기현은 특히 강남, 강북 두 곳에 사무소를 두어 신 변호사가 강남사무소를 관장하고, 이현철 변호사 등이 을지로의 페럼타워에 위치한 강북사무소에 상주하며 기업 관련 분쟁 및 기업 자문 분야에서의 시너지를 겨냥하고 있다. 신필종, 이현철 변호사는 김앤장 합류 전 잠시 판사로 근무한 경력도 있으며, 기현을 구성하고 있는 4명의 변호사 모두 김앤장에서 상당 기간 경험을 쌓은 베테랑 변호사들이다.
이제와 기현은 김앤장 출신이, KL파트너스와 리앤킴은 세종 출신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로펌 변호사들의 독립과 신생 로펌 설립 시도는 거의 대부분의 대형 로펌에서 나타나고 있다.
2012년 7월 문을 열어 스타트업 회사들에 대한 자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법무법인 세움은 당시 세종에서 근무하던 정호석 변호사와 태평양의 이병일 변호사가 의기투합해 시작한 또 하나의 스타트업 법률사무소다. 이후 자문수요가 늘며 법무법인 원에서 활동해 온, 공정거래,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밝은 박진일 변호사와 태평양 M&A 팀의 스타변호사 중 한 명이었던 김선호 변호사가 지난해 가세한 세움은 올 들어서도 중견 변호사들의 합류가 이어지고 있다.
모바일 공간으로도 진출
변호사들은 또 모바일 공간으로도 진출하고 있다. 태평양의 이상민 변호사와 율촌의 박효연 변호사는 지난해 6월 각각 태평양과 율촌을 나와 법률상담 앱인 헬프미(www.helpme.kr)를 띄워 유료상담에서 사건수임으로 이어지는 O2O(Online to Offline) 서비스를 발전시키고 있다. 1년 전인 지난해 3월 문을 연 법무법인 담우엔 부동산 거래와 M&A 자문 경험이 많은 김동우 대표변호사 등 법무법인 세종 출신들이 주축을 이룬 가운데 법무법인 바른에서 경험을 쌓은 남중구 변호사도 참여하고 있다.
규모는 작지만 전문성을 갖춘 신설 부티크, 중소 법률사무소들은 빠른 서비스와 대형 로펌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정한 변호사 보수 등을 내세워 스타트업 자문 등 틈새시장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다. 최소한 기자가 취재한 신설 로펌의 변호사들에게선 사업초기의 불안감 등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사건의 수임과 의뢰인들의 우호적인 반응에 고무된 발전적인 모습이 감지됐다.
설립 후 이미 3년이 더 지난 세움은 가장 활발하게 스타트업 자문을 수행하는 법률사무소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리앤킴도 스타트업을 대리한 투자유치 성사, 서울 강남의 빌딩 매각 진행 등 다양한 사건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 이제와 KL파트너스 등에선 상당한 규모의 공정거래 사건이나 국제중재, M&A 사건을 의뢰받아 수행하며 대형 로펌과 직접 경쟁하는 당찬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제, 배합사료 사건 성공적 자문
이제는 11개사가 관련된 배합사료 부당 공동행위 사건에서 대한제당을 맡아 공정위 전원회의에서 관련 매출액 대비 1%의 과징금만 부과되는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데 이어 78억원의 과징금을 전부 취소하라는 취소소송을 수행 중에 있다. 권국현 변호사는 "11개사 중 7개사가 담합을 자진신고해 상당히 불리한 사건이었으나 가격정보의 교환에 불구하고 실제 경쟁의 핵심적인 정보들에 대한 교환은 이루어지지 않아 유효한 경쟁이 있었고, 경쟁제한효과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주장해 좋은 성과를 낸 경우"라며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수행하지 못할 사건은 없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KL파트너스도 지난해 가을 출범 이후 국제중재 · 국제소송 분야에서 잇따라 신건 수임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이성훈 변호사가 이끄는 M&A팀에서도 수천억원 규모의 대형 거래를 포함, M&A 거래를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다. 2월 초 사조그룹으로 넘기는 인수계약이 체결된 한국제분 매각 거래도 이성훈 변호사 팀이 한국제분을 대리해 마무리한 케이스. 한국제분 매각 거래는 특히 워크아웃에 들어간 가운데 매각을 추진, 채권단 승인까지 받아낸 거래여서 더욱 주목된다.
황지선 변호사 등 KL 합류
이 변호사는 "고급 서비스 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법률서비스 시장은 변호사의 명성, 실력이 의미 있는 매우 독특한 시장"이라며 "사건의뢰도 법률사무소의 단순한 규모보다는 과연 사건을 수행할 능력과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그 사건을 담당할 변호사가 누구인지 특정 변호사를 보고 찾아가는 추세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고 중소 로펌의 발전에 기대를 나타냈다. KL파트너스엔 사건이 늘며 설립 후 두 달 만인 지난해 말 세종에서 활동하던 황지선 변호사가 합류했으며, 세종 출신으로 한국투자공사에서 인하우스 로이어로 활동하던 정두리 변호사도 올 2월 다시 로펌 변호사가 되어 KL파트너스에 합류했다.
약 50년의 역사가 쌓인 한국 로펌업계는 대형 로펌 위주의 과점체제가 형성된 가운데 로펌 소속 변호사들이 중소 법률사무소를 열어 독립하는 분화와 합병이 꾸준히 이어져 온 게 특징이다. 1990년대 초반 법무법인 KCL, 율촌, 충정 등의 출범을 한국 로펌업계의 1차 분화라고 한다면, 2차 분화는 테헤란밸리의 벤처 붐을 타고 지평, 지금의 넥서스의 모태가 된 IBC법률사무소, 노동 전문으로 발전한 아이앤에스 등이 서울 강남에서 경쟁적으로 깃발을 올린 2000년 전후 본격화됐다. 연장선상에서 최근의 잇따른 부티크, 중소 로펌 설립은 3차 분화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벤처 창업과 스타트업 회사들의 활발한 움직임, 대형 로펌에 사건을 맡기기엔 규모가 작고 비용이 부담되는 중소 기업의 현실 등이 최근의 로펌 분화를 촉진하는 요인 중 하나로 얘기된다. 세움을 설립한 정호석 변호사는 "세종에서 M&A 등 회사법에 관한 자문을 수행하며 규모는 작지만 앞으로 큰 발전이 기대되는 스타트업 회사 등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또 경기가 본격 회복되지 않고 있는데서 나타나는 대형 로펌의 피로감과 조직이 너무 커진 나머지 변호사들이 로펌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기 어려운 대형 로펌의 피라미드 구조에 답답함을 느껴 독립의 대열에 가담하는 변호사들도 적지 않다. 권국현 변호사는 "아직 젊을때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다"고 이제로 독립한 동기를 이야기했다. 리앤킴의 이승재 변호사는 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어 행복하다. 매출도 괜찮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3단계 시장개방 연계 주목
최근의 로펌 신설 바람은 조만간 시작될 3단계 시장개방과 관련해서도 시사하는 점이 적지 않다. 영미 로펌과 한국 로펌의 합작법인 설립 움직임이 본격화될 경우 전문성을 갖춘 소규모의 부티크나 중소 로펌이 영미 로펌이 선호하는 우선적인 합작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로펌 변호사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경기침체 등과 맞물리며 변화를 꿈꾸는 변호사들이 좀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로펌 3차 분화의 대열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어떤 방향으로 발전할지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고 있다
김진원 기자(jwkim@leg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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