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7월 9일 국방부 영내 육군본부에 마련된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 '민청학련' 사건 결심공판에 변호인으로 참여한 강신옥 변호사는 "검사들이 학생들을 빨갱이로 몰아 사형을 구형하고 있다. 사법살인 행위다. 변호인으로서 변호한다는 것이 차라리 피고인석에 앉아있는 것만 못한 심정이다"라고 최후 변론을 했다. 그러나 이날의 변론 내용이 문제가 되어 법정모욕죄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구속기소된 그는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다가 이듬해 2월 15일이 되어서야 대통령 특별조치로 석방되었다.
1세대 인권변호사이자 10.26 사건의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변호인이었던 강신옥 변호사의 파란만장한 삶과 혜안 넘치는 사상, 철학을 강 변호사가 직접 육성으로 요약정리한 회고록 《영원히 정의의 편에》가 나왔다. 강 변호사의 사위이자 오랫동안 일간지 기자로 활동한 홍윤오씨가 생전에 강 변호사로부터 들었던 여러 이야기와 2015년~2016년에 걸쳐 진행한 강 변호사와의 인터뷰, 관련 자료들을 토대로 서술, 강 변호사가 2021년 7월 작고한 지 3년 반 만에 출간되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고등고시 행정과(10회) · 사법과(11회)에 합격해 1962년부터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한 강 변호사는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젊은 법관들을 손봐줘야겠다며 시범사례로 지방으로 좌천시킨 두 명의 법관에 포함되어 경주지원으로 발령나자 "판사의 인사이동을 장기판의 졸병 옮기듯 하는 부당한 인사 발령에 순순히 따를 수 없다"며 판사 임관 1년 3개월만에 법복을 벗어던진 강골 판사 출신으로, 이후 그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홍윤오 저자는 "강신옥의 인생에는 세 개의 굵고 선명한 점이 찍혀 있다. 첫 번째 점은 양심적 법조인으로서이다. 두 번째 점은 민청학련 변호인으로서이다. 세 번째 점은 어느 법조인도 원하지 않았을 김재규의 변호인으로서이다"라고 에필로그에 적었다.
서울법대 친구였던 이수성 전 총리는 추천사에서 "강신옥은 가장 친한 친구이면서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다. 강자에게 굴종하지 않고 약자를 도와주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의 꿋꿋한 신념으로 정의와 양심을 지켜온 우리의 귀감"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책 속에서 간추린 주요 내용이다.
▲나는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로 마음을 독하게 다잡았다. 기개 있는 법조인이라면 저항해야만 할 때 저항해야 한다는 소신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나는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정의와 양심을 지키고자 자기의 자리를 걸었던 의롭고 용감한 판검사 다섯 명만 있었어도 수백~수천 명의 억울한 시민들과 무고한 학생들의 피해와 희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법관이 양심을 갖고 판결에 임하면 어느 편이 정의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정의가 무엇인지 몰라서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용기가 없어서 못 하는 것이다.
▲나는 김재규를 면회하며 그가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의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됐다. 브루투스와 같은 처지에 놓인 김재규가 본회퍼처럼 고민하다가 안중근의 심정으로 권총을 끄집어 쏘았다고 하면 이를 억측이라고 무조건 무시할 것인가?
▲나는 "기업가로서 이미 성공했는데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며 정주영의 정치 참여에 극구 반대했다.
▲나는 YS가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해 전직 대통령 두 명을 감옥에 보낸 일은 정의에 합치하는 결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언제까지 과거사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적 시각도 존재했지만, 법률적으로 마무리를 지을 필요성이 있었을뿐더러 군사 독재자들에게 엄정한 정의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이 요구됐음은 분명하다.
▲나는 정치를 비관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을 최전선에서 주도하며 최선의 성과는 아니었을지언정 차선의 결과물은 창출해 냈다.
▲기업의 영리 추구 활동과 관련된 법조인들의 역할이 괄목상대할 정도로 커졌다. 나는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호사들을 '물권변호사'라고 지칭하고 싶다. 물권변호사들이 경제 발전과 국부 증진의 일익을 담당하고, 나라가 부유해진 결과로 국민의 삶이 윤택하게 된다면 물권변호사도 인권변호사의 한 종류일 수 있다.
▲서울대 법대의 영혼을 이루는 정신의 고갱이는 '정의감'이다. 그렇지만 정신과 현실은 따로 놀기 일쑤였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한 유신체제와 경제 성장이 무슨 상관이 있나? 그 어떤 핑계를 둘러대며 합리화한들 독재는 독재이고 살인은 살인일 뿐이다.
▲사법부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해야 잃어버린 권위를 회복할 수 있다. 한 사람이 잘못했으면 한 사람이 반성해야 하고, 집단 전체가 잘못했으면 집단 전체가 반성해야 한다.
▲정의란 죄가 없는 사람에게 벌을 주면 안 되고, 죄지은 사람이 있다면 성역 없이 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이건 진보이건 법을 공평하게 만들고, 이를 공정하게 해석 · 집행하고 난 뒤라야 자기 자리를 제대로 찾아갈 수 있기 마련이다. 나는 정의와 불의가 뻔히 구별되는 사건을 마주하면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무색하리만큼 과격해지곤 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