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거래를 위임받은 사람이 신용협동조합 직원들의 방조로 예금을 무단 인출하는 바람에 예금에 더 이상 이자가 지급되지 않아 예금채권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 대법원은 신협 직원들의 불법행위와 예금채권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손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며 신협에 사용자책임을 인정했다.
부동산 관련 업체를 운영하던 A씨는 2011년 1월 3일 B씨에게 액면 금액 10억원의 자기앞수표, 자신의 신분증과 도장을 주며 자신 명의로 그 자기앞수표를 예금해 달라고 B씨에게 위임했다. B씨는 A씨를 대리해 같은날 C신협에 A씨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고, 이 계좌에 10억원의 자기앞수표를 입금한 뒤 통장을 발급받았으나, 같은 날 그 자리에서 C신협의 직원에게 통장을 분실했다고 신고하고 통장을 재발급받았다. B씨는 분실신고한 원래의 통장을 A씨에게 준 뒤, A씨 명의의 예탁금 지급청구서를 작성해 A씨의 도장을 찍고 재발급받은 통장과 함께 이를 C신협 직원에게 제시하는 방법으로 2011년 1월 4일부터 14일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 A씨 명의 계좌에서 9억 6,000만원을 인출하거나 다른 곳으로 이체했다. 이후 남은 4천만원에 대해 2013년 6월 22일까지 이자 1,604,551원이 발생, 2013년 7월 1일 기준 A씨 계좌의 잔액은 41,604,551원이 되었으나, B씨가 이 돈 마저 위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계좌로 이체했다.
A씨는 이후에도 두 차례 더 B씨에게 26억원과 20억원의 자기앞수표와 신분증, 도장을 교부하며 자기앞수표를 예금해달라고 위임했으나 B가 위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빼돌려 B씨가 A씨 명의 계좌에서 인출하거나 이체해 빼돌린 금액은 원금만 모두 57억 1,604,551원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C신협의 전무는 위와 같이 B씨가 A씨의 동의 없이 예탁금을 무단 인출해 사용한다는 사정을 알면서도 직원들에게 예탁금 예치 즉시 B씨에게 통장을 재발급해 주고 예금 명의자에 대한 본인 확인절차 없이 예탁금을 인출해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A씨는 2018년 4월 B신협을 상대로 예금 57억여원의 반환을 청구하는 소송을 내고, 예비적으로 C신협 직원들이 B씨의 무단 인출 행위를 묵인 · 방조하는 공동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C신협에 사용자책임을 물어 같은 금액의 지급을 요구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예금채권은 5년의 상사소멸시효가 적용되므로, 주위적 청구인 예금반환 청구에 대해 소멸시효가 이미 완성됐다고 판단했다. 예비적 청구에 대해선,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손해와 피고 직원들의 불법행위 사이에는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대법원 제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그러나 4월 28일 "피고 직원들의 사기방조 등의 불법행위와 원고의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손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며 원심판결 중 예비적 청구에 관한 부분을 깨고, 이 부분 사건을 광주고법으로 되돌려보냈다(2020다268265). 주위적 청구에 대한 상고는 기각했다. 법무법인 바른이 상고심에서 A씨를 대리했다. 피고 측은 법무법인 광장이 대리했다.
대법원은 먼저 "원고의 예금채권은 B와 피고 직원들의 위법한 예금 무단 인출 및 이체행위가 있은 뒤에 예금 잔고에 따라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이자가 지급되지 않음으로써 이자 지급에 따른 채무승인으로 인한 시효중단의 효과가 발생하지 않게 되었고, 그사이 원고 역시 권리를 행사하지 아니하여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며 "이 경우 원고가 위와 같은 예금 무단 인출 및 이체사실을 알지 못하였다면, 원고의 권리행사 시점, 피고의 이자 지급약정 내용, 통상적으로 예금에 대해 이자가 발생할 개연성과 이에 대한 사회 일반의 신뢰, B의 편취 방법과 이에 대한 피고 직원들의 방조의 정도와 내용 등을 종합하여 볼 때, B와 피고 직원들에 의한 예금 무단 인출 및 이체행위가 없었더라면 위와 같이 원고의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이라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피고 직원들로서는 B에게 통장을 재발급하고 예금을 무단 인출 및 이체해 줄 당시 그로 인한 결과를 예견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피고 직원들의 사기방조 등의 불법행위와 원고의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손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설령 원고에게 예금채권에 대한 권리행사를 태만히 한 과실이 인정되더라도 그러한 사정은 손해배상의 범위를 정함에 있어 과실상계의 사유로 참작되어야 할 뿐이고 상당인과관계를 부정할 사유는 되지 아니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은 "원심으로서는 원고가 B와 피고 직원들의 위와 같은 예금 무단 인출 및 이체사실을 알았는지 여부를 심리하여 그에 따라 원고의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손해와 피고 직원들의 불법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를 판단하였어야 한다"며 "그럼에도 이러한 사정을 살피지 아니한 채 예금채권에 대한 소멸시효 완성으로 인한 원고의 손해와 피고 직원들의 불법행위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원심에는 불법행위의 성립요건인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B씨는 특경가법 위반(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이 확정됐으며, C신협의 전무도 B씨의 범행을 용이하게 하여 방조했다는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선고받아 확정됐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