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성폭행을 당한 뒤 14년 지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내 손해배상을 받게 됐다. 대법원은 성폭행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은 때부터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진행된다고 보아 소멸시효가 완성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제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8월 19일 전 테니스 선수 A(30 · 여)씨가 성폭행 가해자인 B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의 상고심(2019다297137)에서 이같이 판시, B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B씨는 A씨에게 위자료 1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초등학교 테니스 선수로 활동하던 2001년 7월부터 2002년 8월까지 학교 테니스 코치였던 B씨에게 네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 당시 A씨는 10~11세였다. 성인이 된 A씨는 2016년 5월경 한 테니스 대회에서 B씨와 우연히 마주친 뒤 과거 악몽이 떠오르면서 두통과 수면장애, 불안, 분노 등의 증세에 시달렸다. A씨는 그해 6월경 병원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진단을 받고서 B를 고소했고, 기소된 B씨는 2017년 10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아 확정됐다. A씨는 이어 2018년 6월 B씨로 인해 PTSD 진단을 받는 등 고통을 받았다며 1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심은 무변론으로 진행되어 A씨가 승소했다. 그러나 B씨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가 이미 완성됐다며 항소했다. B씨는 "원고의 손해배상채권은 마지막 범행일인 2002년 8월경부터 시효가 진행되어 10년이 도과함으로써 소 제기 이전에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민법상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는 '손해 및 가해자를 안 날'부터 3년 또는 '불법행위를 한 날'부터 10년이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 "원고는 피고에 대하여 유죄판결이 선고된 때에야 비로소 피고의 불법행위의 요건사실에 대해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어 손해배상청구가 가능하였다고 보이므로, 원고의 손해배상채권의 단기소멸시효 기산일은 위 형사재판의 1심판결 선고일인 2017. 10. 13.이라고 봄이 상당하고, 피고의 불법행위로 인한 원고의 손해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원고가 최초 외상 후 스트레스 진단을 받은 2016. 6. 7.에 그 관념적이고 부동적 상태에서 잠재하고 있던 손해가 현실화 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이는 원고의 손해배상채권의 장기소멸시효의 기산일이 된다"며 "원고는 손해배상채권의 단기소멸시효 기산점인 2017. 10. 13.로부터 3년이, 장기소멸시효 기산점인 2016. 6. 7.로부터 10년이 각 도과하기 전인 2018. 6. 15.에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으므로, 피고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이유 없다"며 A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도 하급심 판단이 옳다고 보았다.
대법원은 "성범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뒤늦게 나타나거나, 성범죄 직후 일부 증상들이 발생하더라도 당시에는 장차 증상이 어느 정도로 진행되고 그것이 고착화되어 질환으로 진단될 수 있을 것인지 예측하기 어려울 수 있고, 이러한 경우 성범죄 당시나 일부 증상의 발생일을 일률적으로 손해가 현실화된 시점으로 보게 되면, 피해자는 당시에는 장래의 손해 발생 여부가 불확실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고, 장래 손해가 발생한 시점에서는 소멸시효가 완성되어 손해배상을 청구하지 못하게 되는 부당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으며, 특히 피해자가 피해 당시 아동이었거나 가해자와 친족관계를 비롯한 피보호관계에 있었던 경우 등 특수한 사정이 있는 때에는 그 인지적 · 심리적 · 관계적 특성에 비추어 더욱 그러하다"며 "따라서 위와 같은 경우 법원은 전문가로부터 성범죄로 인한 정신적 질환이 발현되었다는 진단을 받기 전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손해의 발생이 현실적인 것으로 되었다고 인정하는 데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 사건 불법행위 당시 원고의 나이, 피고와의 인적 관계, 원고가 성인이 되어 피고를 우연히 만나기 전과 후에 겪은 정신적 고통의 현저한 차이 및 그에 따른 치료 여부나 경과 등에 비추어 보면, 원고가 성인이 되어 피고를 우연히 만나기 전까지는 잠재적 · 부동적인 상태에 있었던 손해가 피고를 만나 정신적 고통이 심화되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음으로써 객관적 · 구체적으로 발생하여 현실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하고, "원고가 2016. 6. 7.경 전문가로부터 성범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발현되었다는 진단을 받은 때 비로소 불법행위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손해 발생이 현실적인 것이 되었고, 이때부터 민법 제766조 제2항에 의한 소멸시효가 진행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피고의 소멸시효 항변을 배척한 원심에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는 것이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