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법 150조 1항은 "조건의 성취로 인하여 불이익을 받을 당사자가 신의성실에 반하여 조건의 성취를 방해한 때에는 상대방은 그 조건이 성취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조건의 성취를 방해한 때'란, 사회통념상 일방 당사자의 방해행위가 없었더라면 조건이 성취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음에도 방해행위로 인하여 조건이 성취되지 못한 정도에 이르러야 하고, '방해행위가 없었더라도 조건의 성취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경우'는 조건의 성취를 방해한 때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A사는 2006년 2월 설립되어 전자제품 입력장치에 관련된 특허를 활용한 휴대용 인터넷 단말기, 초소형 인터넷 단말기 등 전자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B사는 2007년 1월 30일 A사에 1,000만원을 투자하면서 'A사는 B사에 지적재산권을 통한 매출 발생시마다 수익금 중 10%를 B사의 투자금 원금을 포함한 5배 금액이 될 때까지 상환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투자협정을 체결했다. 그런데 A사의 대표이사가 "2009년 5월경부터 2010년 8월경까지 A사의 제품설명회 등에서, '당사 제품이 곧 출시될 예정인데 유통점 계약을 체결한 사람들에게만 제품을 공급해 주겠다. A사는 바로 매출 1조원 회사가 되기 때문에 유통점주들은 모두 대박이 날 것이다'라는 등으로 거짓말을 하여 이에 속은 다수 유통점주들로부터 유통점 계약 신청금, 제품 선급금 등을 편취했다"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등 혐의로 기소되어 2018년 12월 유죄 판결이 확정되었다.
B사는 A사를 상대로 'A사는 애초부터 정상적으로 사업을 수행하여 매출을 올릴 의사가 없었고, 위와 같은 사정은 A사가 신의칙에 반하여 조건성취를 방해한 행위로 평가할 수 있으므로 투자협정에서 정한 조건이 성취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취지로 주장하며, 투자금의 5배에 해당하는 약정금 등의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냈다.
대법원 제2부(주심 조재연 대법관)는 그러나 12월 29일 "피고 회사(A)가 투자협정에서 정한 '지적재산권 관련 매출의 발생'이라는 조건의 성취를 방해한 경우로 보기 어렵다"며 B사의 약정금 청구를 인용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원고 패소 취지로 사건을 대전고법으로 되돌려보냈다(2022다266645).
대법원은 "일방 당사자의 신의성실에 반하는 방해행위 등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민법 제150조 제1항에 의해 그 상대방이 발생할 것으로 희망했던 결과까지 의제된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조건의 성취를 방해한 때'란 사회통념상 일방 당사자의 방해행위가 없었더라면 조건이 성취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음에도 방해행위로 인하여 조건이 성취되지 못한 정도에 이르러야 하고, 방해행위가 없었더라도 조건의 성취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경우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다"며 "만일 위와 같은 경우까지 조건의 성취를 의제한다면 단지 일방 당사자의 부당한 개입이 있었다는 사정만으로 곧바로 조건 성취로 인한 법적 효과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이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공평 · 타당한 결과를 초과하여 부당한 이득을 얻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은 "피고 회사가 관련 전자제품을 실제 양산 · 판매하여 매출을 발생시키려는 의사나 능력 없이 원고(B)로부터 투자금을 지급받기만 하였다면, 이는 이 사건 투자협정의 상대방인 원고에 대한 관계에서 신의성실에 반하는 행위라고 평가할 여지는 있다"고 지적하고, "다만, 이 사건 투자협정은 피고 회사가 보유한 지적재산권을 활용하여 관련 전자제품을 개발 · 판매하려는 사업의 준비 단계나 초기 과정에서 체결된 것인데, 당시로서는 피고 회사가 제품을 개발 및 양산할 수 있을지, 나아가 해당 제품이 구매자 등에게 실제로 판매될 수 있을지 여부를 알 수 없는 등 해당 사업의 성공가능성을 예측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도 피고 회사의 사업 실패 등 상당한 위험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투자를 진행하면서, 그 대가로 매출의 규모 등을 불문하고 단지 매출이 발생하기면 하면 투자금의 5배에 이르는 상환금을 지급받기로 약정하였고, 이러한 투자협정 내용에 비추어 보면, 원고로서도 위와 같은 매출 발생이라는 조건이 성취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거기에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 회사의 대표이사가 해당 제품을 개발 · 양산하여 매출을 창출할 만한 능력이 없었음에도 다수 유통점주들로부터 제품 선급금 등을 편취하였다는 혐의로 형사처벌을 받은 점을 더하여 보면, 피고 회사의 방해행위가 없었더라도 이 사건 조건의 성취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지적하고, "따라서 원고가 당시 피고 회사의 전자제품 개발 · 판매 사업이 성공할 것으로 신뢰하였거나 이를 기대하여 투자를 하였더라도, 피고 회사가 개발하려는 전자제품 판매로 인한 매출 발생 가능성 자체가 현저히 낮았다면, 피고 회사가 위 사업 진행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거나 처음부터 그러한 의사가 없었다는 사정 등만으로 피고 회사가 매출 발생이라는 조건 성취를 방해한 경우라고 평가하기 부족하다"고 판시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