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의 궁궐 동쪽에 위치한 왕의 서재에는 한문으로 쓴 낙선재(樂善齋)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에는 장락문(長樂門)이라는 큼직하게 쓴 현판이 있다. 본채의 기둥에는 秋史의 스승인 청나라 옹방강의 주련이 여러 개 걸려 있다. 장락문의 글씨는 秋史의 제자인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며, 낙선재의 현판은 秋史의 친구이며 옹방강의 제자인 섭지선의 글씨이다.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은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 군주로 부친의 스승인 秋史와 옹방강의 예술세계를 흠모하였다.
효명세자의 정신적 스승
헌종의 조부인 순조는 외척인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의 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효명세자는 문화예술과 궁중무용의 제작에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효명세자가 갑자기 죽게 되어 秋史의 집안은 정치적 부침을 겪게 되었다. 효명세자가 왕이 되어 계속 활동하였다면 그의 정신적 스승인 秋史는 육조판서나 영의정의 자리에까지 올라섰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친구인 조인영과 권돈인이 영의정을 지낸 것과 같이 추사도 청류(淸流)의 관직 코스를 밟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秋史는 법률가의 길을 벗어난 다음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에게 요즈음 말로 "붓을 천 자루 대머리로 만들었고, 벼루 10개를 던킨도너츠를 냈다"고 말했을 정도로 절차탁마를 통해 새로운 독창적 예술세계를 열었다. 秋史는 법률에만 천착하는 편협하고 고루한 전문가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닥친 역경을 슬기롭게 이겨내 학문과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합적 예지력을 갖추고, 불교와 유교의 회통 속에 탈속과 달관의 경지에 올랐다. 그는 수신(修身), 제가(齊家)와 치국(治國)을 넘어 학문과 문화예술의 넓은 우주에서 평천하(平天下)를 달성한 탁월한 지성이다.
秋史 김정희(1786. 6. 3.-1856. 10. 10.)는 누구나 아는 것 같으면서도 그 경지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학자와 예술가이며, 조선 후기 학문과 예술의 세계에 우뚝 선 거봉이다. 일반적으로 추사체의 서예가로 널리 알려진 秋史의 직업은 다양하다. 그는 금석학자, 고증학자, 경학자, 불교학자, 시인, 행정관료, 정치인, 교육자, 화가, 서예가, 서화감식가 등 여러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며 최고의 경지를 보여준 다재다능한 천재형 학자이다. 추사는 한계를 거부하는 폴리매스(polymath)형 종합적 지식인으로 북송의 소동파나 독일의 괴테(Goethe)에 비견될 수 있다.
소동파에 비유되는 폴리매스 지식인
관직의 길에 들어선 秋史는 처음에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로 출발하여, 정4품의 필선과 정3품 당상관인 보덕을 맡기도 하였다. 보덕은 세자시강원의 최고 직책이고 종전에 종3품의 직급이었다가 정조 이래 정3품의 당상관으로 승격되었다. 이처럼 秋史는 왕실의 세자교육을 책임지는 역할을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맡았다. 秋史는 규장각 대교를 맡은 후 그 책임의 막중함을 이유로 사직의 소를 내기도 하였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내각 학사의 직책에 자부심을 가졌던 秋史는 완주에 있는 정부인 광산김씨 묘비에 이삼만과 함께 쓰고 '규장각 대교 김정희'라고 명기하기도 했다. 규장각은 내각에 속한 관청으로 대교는 신진 관료가 임용되는 최고의 직위이자 장차 정승의 길로 나아가는 청요직에 속한다. 규장각 대교는 학문이 박식하고 문장이 출중해야 하고, 고결한 인품과 높은 인망이 발탁의 표준이 되기도 했다.
성균관 대사성 발령
秋史는 오늘날 국립대학교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관 대사성의 발령을 받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성균관은 국가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유생에게 교육하는 최고 국립대학이었기 때문에 그 기관의 장인 대사성은 사유(師儒)의 장(長)으로 유학의 경전에 해박하고 덕행을 겸비한 인재가 발탁되는 자리였다. 추사는 성균관 대사성에 발령받고 관직을 사양하는 소를 작성하였다. 그 요지는 그 직책이 영광스러운 높은 지위로 유생들의 스승이라는 인망을 얻는 것이지만, 보잘것없고 용렬하여 가장 남의 밑에 맴돌고 재주와 식견이 천박하여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秋史는 또 인재를 양성하고 문풍(文風)을 크게 천향하는 일을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중화(中和)를 교도하는 직을 감당해내기 어렵다고 했다. 성균관 대사성의 재임기간은 19세기 전반에 대략 3, 4개월의 단기에 그쳤고 秋史도 그곳에서 오래 근무하지 않았다. 추사는 이와 함께 왕실의 특별감찰직에 해당하는 충청우도 암행어사와 오늘날의 법제처 법제관에 해당하는 의정부 검상을 거치고 형조참판으로 발령받기도 하였으므로 이 글에서는 법률가로서의 秋史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법률가와 어울리는 아호 '秋史'
秋史는 경주김씨인 부친 김노경과 기계유씨 모친의 장남으로 충남 예산 용궁리에서 태어나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김정희의 자는 원춘(元春)이다. 김정희의 호는 100여개가 넘어 일일이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대표적인 아호는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이다. 그 밖에 보담재, 예당, 시암, 내각학사, 천축고선생, 승설도인, 청관산인, 노과, 농장인 등을 아호로 사용하고 있다. 秋史는 추상같은 역사의 기록이라는 의미이다. 완당은 중국의 대학자인 완원을 흠모하여 스스로 완당이라고 지었고 고증학과 금석학의 학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는 법률가의 관점에서 어울리는 秋史라는 아호를 사용하기로 한다.
秋史는 어려서부터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특이한 성품을 타고 났다. 秋史는 약관의 나이에 백가의 서적을 탐독하여 옛 것을 좋아하는 호고(好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秋史의 어린 시절 성품은 조용하고 밝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완당전집의 민규호가 쓴 '완당 김공소전'에 의하면 "공은 매우 청신하여 유연하며 기국이 안한하고 화평하여 사람들과 말을 할 때는 모두를 즐겁게 하였다. 그러나 의리(義理)의 관계에 미쳐서는 의론이 마치 천둥 벼락이나 창 · 칼과도 같아 사람들이 모두 춥지 않아도 덜덜 떨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秋史가 서화를 감식할 경우의 '금강안 혹리수(金剛眼 酷吏手)'와 같은 철저하고 엄정한 평가를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秋史는 논어에 나오는 군자삼변(君子三變)처럼 멀리서 보면 엄숙함을 느낄 수 있고, 가까이 다가서면 따뜻함이 느껴지며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정확하고 분명한 논리를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秋史의 생부인 유당(酉堂) 김노경은 붓글씨를 잘 썼고 秋史의 외가가 전북 김제이고 외조부가 김제군수를 지냈는데, 기계유씨 집안의 사람들도 글씨체가 좋았다. 秋史는 그의 부친인 김노경의 가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秋史의 향저인 예산에는 화암사라는 집안의 사찰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불교를 가까이 하였다. 秋史는 일평생 불교에 심취하여 절친인 초의선사 등 스님과 교류하고 불이선란도를 그리기도 하였으며, 사찰의 대웅전이나 무량수각 등의 현판을 쓰기도 하였다. 해인사 중건에 즈음하여 경상관찰사로 있으면서 해인사 건립에 공헌한 김노경이 아들 秋史로 하여금 해운사 대웅전 건립을 위한 권선문과 함께 상량문을 짓도록 하였다.
봉은사 판전 현판도 추사 작품
秋史는 71세로 졸하기 3일 전 서울 강남구의 봉은사 판전(板殿)의 현판도 썼다. 평생을 불교서적을 탐독하며 불교철학에 깊이 천착하여 친구인 초의선사와 평생지기로 우정을 나누고 백파선사와 논쟁을 한 秋史는 '해동의 유마거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秋史가 6살 때 통의동 월성위궁의 대문에 쓴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라는 입춘첩을 보고 박제가가 장차 크면 이 아이를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문장의 대가인 박제가가 秋史를 지도하며 새로운 학문인 실학에 눈뜨게 하였고, 연경(북경)의 학자들과 인맥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秋史는 15세부터 서얼 출신의 박제가로부터 글을 배우고 그를 통해 중국 학계의 인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3차례 연경을 다녀온 박제가로부터 최신 학문은 물론 국제적 감각과 한 가지에 몰두하는 벽(癖)의 정신을 전수받았다고 보인다. 秋史의 예술활동의 결정체인 추사체도 붓 1천 자루와 벼루 10개를 마모시킨 절차탁마와 벽광(癖狂)정신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秋史의 벽광정신은 '벽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말한 스승 박제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박제가에게 전수받은 癖의 정신
秋史는 이미 20세가 되기 전에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하였고, 특히 주역을 비롯한 유교 경전을 깊이 있게 읽었다. 기억력도 좋았다. 가족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어려서부터 서예 솜씨가 특출하였고, 어린 시절에 부친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 비범하였다. 秋史가 24세되는 해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꿈에 그리던 연경에 갈 기회가 생겼다. 동지부사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연경에 가게 되었는데 대부분 사절단이 일정을 마친 후에 화려한 건물이나 풍경에 관심을 두고 관광에 열중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秋史는 조강과 서송의 소개로 당대 청나라 최고의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을 비롯한 여러 문사들과 사귀면서 보내다가 돌아왔다. 秋史는 옹방강의 석묵서루를 방문하여 8만권의 방대한 서적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옹방강은 고령인데도 젊은 秋史에 큰 기대를 걸었고, 완원은 추사가 귀국한 후 1,400권의 황청경해 초고를 일본보다 먼저 秋史에게 보냈을 정도로 각별히 아꼈다. 최고의 석학인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아호를 중국의 스승을 흠모하는 의미에서 보담재와 완당으로 짓기도 하였다. 秋史는 청나라 문사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속에서 학문과 예술에 시야를 크게 뜨면서 금석학, 고증학, 경학뿐만 아니라 불교, 시서화에 최고의 경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동안 秋史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지만 秋史의 공직활동에 대한 연구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다. 秋史는 이미 20대에 관직으로 나아가기 전에 '실사구시설'에 관한 글을 남겼다. "실사구시(實事求是)란 사실에 의거하여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의미이다. 이는 학문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도리이다. 만일 사실에 의거하지 않고 다만 허술한 방도를 편리하게 여기거나 그 진리를 찾지 않고 다만 선입견을 위주로 한다면 성현의 도에 있어 배치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또한 "학문하는 도리는 이미 요순과 주공, 공자를 귀의처로 삼았으니, 굳이 한 · 송의 한계나 주희, 육구연, 설선, 왕수인의 문호를 다툴 필요가 없고 다만 심기를 침착하게 갖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자세는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실사구시를 지향하고 있다.
秋史가 활동하였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반의 조선사회는 청나라가 서양학문을 받아들이며 문화강국의 최정점에 위치하고 있어 북학파를 중심으로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학문인 실학이 성리학을 대체하여 등장할 때 秋史는 청나라의 고증학과 금석학 등 청조문물을 실용적 관점에서 받아들여 경세치용학파나 이용후생학파와는 계보를 달리하는 실사구시학파로 통칭된다.
秋史는 문화와 예술의 높은 경지를 개척하면서 사회적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역량 있는 제자를 길러내는 문예의 종장이자 영수에 올라 우리 문화와 예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흥선대원군 난 칭찬
秋史의 공직에서의 활동은 크게 교육적 역할이 많았다. 세자시강원의 설서, 보덕, 성균관 대사성 등의 여러 관직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의 예술적 작품 중에 대련의 형식은 秋史의 창조성이 돋보이는 형식으로 교훈적 글귀를 담고 있다. 秋史의 세한도는 단지 그림이 아니라 발문을 통하여 제자에게 전하는 교육자의 큰 가르침이다. 권세와 이익에 따르는 세태를 풍자하면서 권세도 없는 자신에게 다량의 서책을 선물한 것에 대하여 의아해하면서도 추운 겨울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고 푸른 것을 알 수 있듯이 선비의 고결한 절개와 의리를 강조하며 제자에 대한 고마운 심경을 그림과 발문으로 전하고 있다. 예술이 그저 예술로서가 아니라 교육적 목표를 수행하는 구도적 삶의 자세를 보여준다.
秋史는 공직에서뿐만 아니라 공직을 떠나 제주 유배시절에도 제자들을 잘 길러낸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秋史는 제자에게 엄혹한 평을 하기도 하였다. 특히 그의 심복으로 불리는 우봉 조희룡에 대해 학문적 깊이가 없고 손재주만 있다고 평했다. 흥선대원군이 난을 치는 것에 대하여 "압록강 동쪽에 이만한 작품이 없다"고 칭찬하면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주문하기도 하였다.
명문가 출신의 家禍
조선시대 명문가 출신으로 태어나 역경을 거치면서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나아간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억울한 일로 누명을 쓰고 유배지에서 희망의 해배(解配)와 절망의 독배(毒杯)의 운명을 가르는 파발마의 소리에 긴장하며 겪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의지를 꺾지 않고 학문과 예술의 경지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사람 중에 秋史라는 불세출의 인물이 있다.
조선 시대는 분명 양반사회로 신분적 계급사회였다. 출신성분에 따라 가능성이 달라지는 삶을 살게 되어 있다. 秋史는 노론 벽파의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좋은 여건 속에서 꿈을 키워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秋史보다 더 좋은 여건임에도 그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천출이나 평범한 가정에서 성장하였음에도 높은 경지에 도달한 경우도 있다. 秋史가 명문가 출신이어 성공한 것으로 단정할 것은 아니나, 신분사회에서 고위직에 있는 부친의 도움으로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분명하다. 또 秋史는 큰아버지인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청소년 시절 모친과 큰아버지 등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는 고통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독한 삶 그리고 유배 속에 놓인 환경이 좋은 스승보다 못지않다고 본다. 秋史는 와전된 독설로 인해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그에게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었다. 秋史는 잠오(箴傲)라는 글에서 논어 양화편에 나오는 백성의 3가지 병인 광(狂), 긍(矜), 우(愚) 중에서 미친 경지인 광은 오히려 가르칠 만하지만 오만한 사람은 가르친다는 말을 못 들었다고 하면서 오만은 덕을 흉하게 하는 것으로 백성의 악으로 보았다. 추사가 오만을 미칠 광(狂)보다 경계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는 중용을 강조하는 성리학의 전통과는 거리가 있는 파격적인 접근법이다. 공자의 지호락(知好樂)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비인현감 봉고파직
秋史의 고조부가 영의정, 증조부가 영조의 사위이고 영조의 비로 정조 사후에 수렴청정을 한 정순왕후 역시 경주김씨로 秋史의 먼 친척에 해당한다. 秋史는 조선후기 왕실의 집안이라고 할 수 있다. 秋史의 조부 김이주는 형조판서를 지냈다. 생부인 김노경은 대사헌과 평양감사, 경상도 관찰사,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의금부의 최고책임자인 판의금부사 등 다양한 고위직을 맡았다. 그러나 명문가 자제인 추사는 경주김씨 세력을 견제,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음모로 인해 가화(家禍)를 겪게 되어 좋은 집안의 배경이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秋史가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비인현감인 김우명에 대한 봉고파직을 강단 있게 처리한 것이 암운(暗雲)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렇지만 秋史는 대과에 합격한 후 한림소시를 거쳐 세조시강원 설서, 필선, 문학,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 우부승지, 동부승지, 규장각 검교, 대교 겸시강원 보덕, 예조참의, 좌부승지,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秋史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을 거쳤고, 헌종은 秋史가 54세일 때 회재 이언적을 모신 서당인 옥산서원의 현판을 쓰도록 했다. 秋史는 55세에 동지부사로 발령이 나 30년 전의 부친을 따라 연경에 간 이래 다시 북행 길에 오르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되었으나, 안동김씨 외척 세력의 정치적 음해로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秋史의 집안은 노론 벽파이고, 당시 조정은 조인영 등 풍양조씨와 秋史의 집안인 경주김씨가 합세하여 안동김씨에 대립하는 형국이었다. 秋史가 동지부사로 중국 연경에 다녀올 경우 엄청난 정치적 영향력의 파장을 미치게 되므로, 당시 세도정치의 주류를 형성한 안동김씨 측에서 윤상도 옥사를 끄집어내 秋史와의 관련성을 억지로 연결시켜 탄핵상소를 올려 국문을 통해 사형에 처하게 하려고 하였다. 당시 조인영은 외척으로 우의정의 직에 있었다. 秋史와 과거시험에 함께 합격하였고, 조인영이 장원급제하였다. 20대에 秋史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조인영과 함께 고증하기도 하였다. 그는 풍양조씨로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연합적 외척세력에 의하여 순조와 헌종의 재임 동안 권력의 정점에 서기도 하였다. 秋史는 친구인 조인영의 도움으로 사형은 면하고 위리안치형으로 감형되어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제주도로 유배가게 되었다.
행정법률가의 길
秋史는 1809년(순조 9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19년(순조 19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秋史는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많은 책을 읽어 만사에 통달하였고, 독서와 금석학과 고증학에 관한 연구를 하는 등 10년간의 내공을 갖추어 문과에 합격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당시 순조는 "흥정당에 나가 문 · 무과의 사은을 받고, 새로 급제한 김정희에게 사악(賜樂)하라"고 명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월성위의 봉사손이 지금 등과하였으니, 실로 기쁘고 다행스럽다. 귀주의 내외묘에 승지를 보내 치제하도록 하라"고 되어 있다. 秋史는 다음 해에 한림소시에 다시 도전하여 관직으로 출사한 이래 왕실과 내각에 배치되어 세자시강원의 설서, 보덕, 규장각 대교, 의정부 검상 등 재상의 길로 나아가는 핵심적 청요직을 거쳤다.
조선시대는 오늘날과 같은 법률가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으나, 국법을 적용하고 이를 토대로 법집행을 하는 행정관료를 법률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秋史는 승정원의 승지나 의정부 검상으로 활동하면서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과 법 제정, 교시의 작성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왕세자인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기에 규장각 검교, 대교와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러한 직책은 왕실의 세자교육, 문서작성, 법령의 제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직책이다.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과 형조참판의 행적은 사료가 남아 있지 않아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충청우도 암행어사 출두
秋史는 41세 때인 1826년(순조 26년) 2월 20일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순조의 임명장을 받아 사목과 마패 그리고 유척을 가지고 백십여일에 걸친 암행활동을 끝내고 해당 고을의 벼슬아치들의 공과를 적어 그해 6월 25일 조정에 암행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秋史는 충청우도와 일부 경기도의 공직자의 부정과 비리에 대한 감찰과 백성들의 민생고를 탐문하고 조사하여 상세한 보고서를 통해 이를 해결하는데 노력했다. 秋史는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은밀하게 증거를 수집하였고, 불법비리를 저지른 관리에 대한 죄상에 대하여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선행을 베푼 관리에 대한 내용은 비교적 간단히 기술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秋史는 비인현감 김우명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으로 인해 훗날 그가 김노경과 秋史를 탄핵하는 악연을 맺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28권 6월 25일자에는 충청우도 암행어사 김정희의 서계(書啓)대로 상벌을 시행하는 것으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즉 "충청우도 암행어사 김정희가 서계를 올려, 서산군수 한용검, 예산현감 이명하, 한산군수 홍희석, 노성현감 이시재, 태안 전 군수 허성, 보령 전 현감 송재순, 비인현감 김우명, 청양현감 홍일연, 진잠현감 황도, 결성 전 현감 조석준, 남포 전 현감 성달영과 전 수사 윤상중 등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니, 모두 경중을 나누어 감죄하고, 별단(別單)의 군(軍) · 전(田) · 적(糴)에 대한 삼정(三政)과 증미를 백징하는 것과 안면도의 송정(松政)과 안흥 굴포의 어염세 · 선세 등의 폐단을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점을 따라 채택 시행하게 하였다."
특히 비인현감 김우명에 대하여는 "부임한 이래 좋은 업적이 하나도 없다. 일을 처리할 때에는 추하지 않은 것이 없고 이익을 발견하면 아주 작은 것도 남겨두지 않는다. <중략> 소송을 바르게 이끄는 것은 민정의 중요한 관건인데 겉으로는 잘 이끈 듯하면서 속으로는 호응하여 교활한 서리가 그 거간 역할을 하고, 아침에 확립된 것이 저녁에 무너져 뇌물의 문이 크게 열렸다"고 밝히고 있다.
암행보고서에서 秋史의 가지런한 명필 글씨체로 서계와 함께 별단을 제출하고 있다. 별단은 바로잡아야 할 피폐한 정책과 속히 돌봐야 할 백성의 아픈 곳을 담고 있다. 秋史는 암행보고서에서 관맹득의(寬猛得宜)를 강조하여 엄벌만이 능사가 아니라며 조화의 정신을 강조하였다. 수사, 체포하는 정치와 감시 · 심문하는 방도에 있어 관대함과 엄격함이 조화를 이루어 넉넉한 행보를 보인다고 평가하고 있다. 역대 암행어사 중에는 엄정하게 직분을 수행한 영조시기 박문수, 정조시기 정약용, 순조시기 김정희, 철종시기 박규수, 고종시기 박정양 등이 유명하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지방수령을 비롯한 탐관오리를 적발하여 처벌하는 감찰활동이 주된 임무였고 별단에서 삼정의 문란 등 제도개선의 내용도 담고 있으나 백성들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秋史의 법사상과 공직관
조선시대에 법률가가 있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판사, 검사, 변호사와는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었고 행정과 사법이 혼합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경국대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으로 된 법전이 있었고, 형사법전으로 대명률 그리고 민사에 관한 관습법이 있었다. 최근에 추안급 국안, 사법품보를 비롯하여 소송기록인 결송입안이 번역되어 조선시대의 사법제도를 연구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조선시대 당시 의정부나 승정원 등에서 법제와 감찰, 형정을 담당하는 관료가 오늘날의 공직에서 법률적 업무를 처리하는 행정법률가(Verwaltungsjurist)와는 다르지만 경국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의 법전과 관례 및 왕의 교시, 왕실례와 가례에 의한 행정이 이루어졌다.
법률은 국회에서 제정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의회가 없는 조선시대의 법을 다루는 사람을 법률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다른 양반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의 법 제정의 과정에 참여하거나 법을 적용하여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면 그의 활동은 오늘날의 법률가와는 다르지만 법률가로 말하더라도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본다. 조선시대는 오늘날과 같은 법률가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으나, 국법을 적용하는 행정관료를 법률가의 범주로 넣을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秋史의 법사상과 공직관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첫째, 엄정한 법집행과 정확한 일처리를 들 수 있다. 우선 암행보고서의 서계 앞부분에서 秋史는 백십여일 동안 수천리의 길을 탐문하였고, 읍과 저자의 요지, 산골짜기와 바닷가 외진 섬까지 모두 찾아가는 철저함으로 해당 내용을 수사하고 감찰하였는데, 해당 관리의 정치행태와 민생의 고락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반드시 정확성을 기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엄정한 법집행과 정확한 일처리
이처럼 秋史는 사실관계에 중점을 두는 고증학과 금석학에 정통하였다. 이와 같은 자세는 증거재판주의나 객관적 논거를 제시하는 결론 도출 등 오늘날의 법학 방법론과 관련성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秋史는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사물을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秋史는 법과 기강을 무시하고 탐욕과 학대를 일삼다가 교체된 전 첨사에 대하여 암행보고서에서 "이미 교체되었다고 하여 그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고 엄격한 법집행을 강조했다.
둘째, 원칙 중시의 직(直)사상을 들 수 있다. 秋史가 과거에 합격한지 얼마 안 되어 출사의 길에 나아가면서 행정관료는 올곧은 자세로 공직을 수행하여야 하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는 "곧은 소리는 대궐 아래 머무르고, 빼어난 글귀는 동쪽 하늘(우리나라)에 가득하구나"라는 뜻의 '직성유궐하 수구만천동(直聲留關下 秀句滿天東)'라는 대련에서도 볼 수 있다.
추사가 66세의 나이에 진종조천논쟁이 있었다. 왕통의 계승으로 따지면 진종(사도세자의 형)-정조-순조-익종(효명세자)-헌종으로 이어져 진종은 철종의 5대조가 되므로 진종은 종묘 영녕전에 조천해야 한다는 의견과 혈통상으로 보면 진종은 철종의 증조가 되므로 조천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맞서며, 왕통과 혈통 중에 어느 것을 우선으로 삼을 것인가의 문제로 예론이 대두하였다.
우의정 김홍근 등 안동김씨 세력은 왕가는 대통의 차서로 대수를 삼아 진종에서 헌종은 5대조가 되므로 조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영의정 권돈인은 혈통을 중시하여 조천하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반대하였다.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과 미수 허목간의 예송논쟁이 있었지만 사가의 예법을 왕가에도 적용하는 혈통의 관점에서는 이른바 통치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제자인 송시열의 노론 예학의 직사상의 기본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진종조천논쟁에 북청으로 1년 유배
그런데 철종 시기에 벌어진 진종조천 논쟁에 안동김씨 세력은 현실적 차원에서 왕실의 입장을 대변하였고, 진종조천을 반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주장에 이론적 뒷받침을 한 秋史는 북청으로 1년여 유배를 다녀와야 했다. 권돈인 역시 이로 인해 파직을 당하고 순흥으로 유배를 갔으며, 秋史의 형제와 제자 우봉 조희룡 등도 유배의 화를 입었다. 秋史의 기본적 입장은 원칙 중시의 직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공직자의 청렴정신을 강조하였다. 秋史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제자 남병길에게 '남기는 집의 의미'로 유재(留齋)라는 현판을 써주었다. 남병길의 아호인 유재는 "녹봉을 다 쓰지않고 남겨 조정으로 돌아가게 하며, 재물을 다 쓰지 않고 남겨 백성에게 돌아가게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암행어사 보고서에 나타난 바와 같이, 秋史는 잉여금을 사적 용도로 사용한 부분도 문제 삼았으나, 대흥 군수 홍희익에 관하여는 청렴하고 근면한 정치가 한결같이 변함이 없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소송 판결의 공정성 강조
넷째, 소송 판결에 대한 공정성 강조를 들 수 있다. 秋史는 소송 판결을 백성들의 아픔을 해소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았다. 뇌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법을 무시하는 자들은 이미 직이 교체되었다고 하여 죄를 논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태안 전 군수 허성의 경우 소송에 대한 판결이 공평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진휼정책 또한 명성이 있으나, 위급한 상황을 보고받은 후에 구제에 나서는 일체의 일을 전혀 신중히 처리하지 않아 소속 아전들이 이를 훔쳐가더라도 단속하지 않은 부작위에 대하여, 비록 파직되었으나 후일을 징계하는 도리에 있어 별도의 엄한 처분이 있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충과 효의 공직관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독실하게 실천하는 전문가 정신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는 분명 양반사회로 신분적 계급사회였다. 출신 성분에 따라 가능성이 달라진 삶을 살게 되어 있었다. 秋史는 유배형을 받은 신산(辛酸) 같은 삶의 굴곡 속에서도 국왕에 대하여 충성을 다했다. 秋史는 유배시절, 30년 전 사재를 털어 기근에 시달리는 제주도민을 살려낸 김만덕 여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은혜의 빛이 세상을 덮는다는 의미로 '은광연세(恩光衍世)'라는 편액을 써서 김만덕의 후손에게 전하였다. 한국형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 oblige)' 정신의 귀감이 되도록 한 것이다.
아울러 秋史는 부모에게 극진히 효를 다했다. 그는 부친의 억울한 누명을 벗도록 하기 위해 양반이 통상적으로 하는 상언을 하는 대신 격쟁이라는 하층민이 사용하는 방법으로 억울함을 변호하였다. 이러한 격쟁은 한두 차례에 그친 것은 아니다. 그의 부친 김노경이 모함을 받아 오랫동안 고금도의 유배지에서 돌아오지 않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왕의 행차시에 격쟁을 통해 억울함을 호소하여 부친의 해배를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秋史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지 않고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예술가적 삶과 청류적 법률가의 삶을 병행하였고, 관직의 길에서 유배로 나아가게 되면서 창작활동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는 학자와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秋史는 그의 관료적 삶 속에서 박학독행(博學篤行)의 법률가로 실사구시에 입각하여 원칙과 정도의 강단 있는 공직자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철종실록에는 秋史의 졸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전 참판 김정희가 졸하였다. 김정희는 이조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서적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도사(圖史)에 깊이 통달하여 초서 · 해서 · 전서 · 예서에 있어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중략> 어린 시절에 영명(英名)을 드날렸으나, 중간에 가화(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 가고 북쪽으로 귀양 가서 온갖 풍상을 다 겪었으니, 세상에 쓰이고 혹은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고 또는 물러갔음을 세상에서 간혹 송(宋)나라의 소식(蘇軾)에게 견주기도 하였다."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kasan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