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66) 전 대통령이 항소심에서 1심보다 형량이 1년 늘어난 징역 2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특히 1심 판결과 달리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사이에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에 대한 묵시적 청탁이 있었다고 판시, 이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 이 대목은 현재 대법원에 상고되어 있는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재판에서도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았던 부분으로, 지난 2월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하며 이 부회장을 석방한 항소심 재판부는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승계작업이나 이에 대한 부정한 청탁이 없었다고 보았다. 결국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는 승계작업과 묵시적 청탁을 인정한 반면, 이 부회장의 항소심 재판부는 반대로 이를 부정, 대법원에서 어느 한 재판은 파기를 면할 수 없게 된 셈이고, 대법원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항소심 판단대로 승계작업과 묵시적 청탁을 인정한다면 이후 진행될 이 부회장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양형 판단 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서울고법 형사4부(재판장 김문석 부장판사)는 8월 24일 특가법상 뇌물 등의 혐의로 기소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항소심(2018노1087)에서 1심 판결을 깨고, 징역 25년과 벌금 200억원을 선고했다. 1심에서의 형량은 징역 24년과 벌금 180억원.
재판부는 핵심쟁점이었던 삼성의 뇌물 제공과 관련,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작업이 존재하고, 박 전 대통령이 2015. 7. 25. 이 부회장과의 단독 면담 당시 이 부회장의 승계작업이라는 현안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으며,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승계작업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는 이상 묵시적 의사표시에 의한 청탁이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먼저 승계작업이란 '이 부회장이 최소한의 개인자금을 사용하여 삼성그룹 핵심 계열사들인 삼성전자와 삼성생명에 대하여 사실상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을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의미한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의미의 승계작업은 그 성질상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경제적 · 사회적 · 제도적 · 정치적 환경의 변화에 따라 구체적 내용이 유동적일 수밖에 없고, 청탁의 대상인 직무행위에 대응하는 승계작업은 대통령의 직무와 영재센터 등에 제공되는 이익 사이의 대가관계를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되면 충분하고 구체적일 필요가 없으므로, 승계작업의 존재가 인정되기만 한다면 그 승계작업을 구성하는 개별 지배구조 개편 내용이 청탁 당시에 구체적으로 특정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특히 "이건희 이후 삼성그룹의 지배권을 승계하는 이재용으로서는 이건희 상속과정에서 대주주 일가의 지배권 축소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향후 경제적 · 사회적 · 제도적 ·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른 지배권 약화의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하여 계열사들을 통할하면서 그 운영을 지원 · 조정하는 조직인 동시에 대주주의 경영지배권 행사를 지원하는 조직인 미래전략실을 통하여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들인 삼성전자, 삼성생명에 대한 지배권을 최대한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따른 지배구조 개편을 진행하여 왔다"며 "개별 현안의 목적 및 효과, 미래전략실의 관여 등에 비추어 보면, 특검이 주장하는 개별 현안들 중에서 삼성SDS 및 제일모직의 유가증권 시장 상장,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엘리엇 등 외국자본에 대한 경영권 방어 강화 추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따른 신규 순환출자 고리 해소를 위한 삼성물산 주식 처분 최소화,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계획에 대한 금융위원회 승인 추진은 승계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된 현안들로서 승계작업을 구성하는 개별 현안들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승계작업 중 가장 핵심 현안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재판부는 "2015. 7. 25. 단독 면담 당시 피고인은 이재용의 승계작업이라는 현안에 대하여 인식하고 있었고, 단독 면담은 가장 핵심적인 승계작업으로 평가되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우호적 조치 직후에 실시되었다"며 승계작업과 관련한 '묵시적 청탁'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에 따르면, 국민연금공단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관한 의결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기금운용본부는 기금운용의 독립성 원칙을 침해하는 보건복지부의 부당한 지시로 전문위원회가 아닌 투자위원회에서 이를 결정하게 되었고, 투자위원회에서는 비합리적으로 산출된 적정 합병비율, 급조된 합병시너지 분석 결과와 기금운용본부장 홍 모씨의 투자위원들에 대한 압력 행사 등으로 합병 안건에 대한 찬성 결정을 유도했다. 재판부는 "피고인과 특별한 신임관계에 있는 안종범의 관여와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 문제는 고용복지수석실 소관임에도 경제수석비서관인 안종범을 통해 투자위원회 결정에 대한 최종적인 승인이 이루어진 정황 등을 종합하여 보면, 국민연금공단이 합병 안건에 대하여 찬성 입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고인의 지시나 승인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2015. 7. 25. 단독면담 이후에도 승계작업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우호적인 기조가 계속 유지되었다"고 보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2015. 7. 25. 단독 면담 자리에서 이재용에게 문화 융성과 스포츠 발전을 위한 지원과 동계스포츠 메달리스트들이 설립한 단체 지원을 요청한 데 이어 2016. 2. 15.에 있었던 이재용과 단독 면담에서도 이재용에게 금액을 특정하여 영재센터 지원을 요청하였고, 피고인과 이재용 사이에서는 이때에도 여전히 이재용의 승계작업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사리에 맞는다"며 "영재센터 등에 대한 지원이 이 공통의 인식과 대가관계에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청탁의 대상이 되는 직무집행 내용과 이러한 지원이 그 직무집행에 대한 대가라는 점에 대하여 피고인과 이재용 사이에서 공통의 인식이나 양해가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이 경우 묵시적 의사표시에 의한 청탁이 성립한다"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최순실씨 변호인인 이경재 변호사는 "후삼국 시대 궁예의 관심법이 21세기에 망령으로 되살아났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삼성이 최순실(개명 후 이름 최서원)씨가 지배하는 동계스포츠 영재센터에 낸 후원금 16억 2800만원에 대해 부정한 청탁의 존재와 대가관계를 인정, 유죄를 인정했다. 그러나 미르 · K스포츠재단에 낸 출연금 204억원은 뇌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두 혐의는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유죄가 인정되는 '제3자 뇌물죄'로 기소되어 승계작업에 대한 부정한 청탁 여부가 유무죄 판단에 중요하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의 영재센터 지원 요구는 그 지원 대상, 규모 및 방식 등이 매우 구체적으로 특정되어 있었고, 삼성 측은 영재센터가 정상적인 공익단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원을 결정하였으며, 삼성 측은 후원금의 산출 근거에 대한 충분한 검토조차 없이 후원금을 지급하였다"고 부정한 청탁에 대한 대가관계가 인정된다고 보았다.
반면 미르 · K스포츠재단 출연에 대해서는, "박 전 대통령은 단독 면담 자리에서 이재용에게 각 재단에 출연해달라고 구체적으로 요구하지 않았고, 이재용도 당시 박 전 대통령의 문화 융성과 스포츠 발전을 위한 지원 요청을 각 재단에 대한 출연 요구로 인식하지 않았다"며 "삼성그룹은 통상적인 공익활동의 일환으로 각 재단에 대한 출연행위에 나아갔을 가능성이 있고, 이재용 등은 각 재단이 사적 이익 추구를 위하여 설립되고 운영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또 "삼성그룹은 전경련의 출연금 가이드라인에 따른 출연금 분담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한 것일 뿐, 출연금의 규모를 결정하는 데 적극적 · 능동적 의사결정을 한 바는 없고, 다른 출연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각 재단에 대한 출연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경우 입을 수 있는 불이익에 대한 우려 등으로 각 재단에 대한 출연 결정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승계작업 외에 ①외국자본에 대한 경영권 방어 강화 ②투자 유치, 환경규제 완화 등 바이오 사업 지원에 도움을 달라는 취지의 부정한 청탁이 있었다고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최씨의 딸인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 부분에서도 1심 재판부와 일부 달리 판단했다.
재판부는 "용역계약 체결 과정에서 최서원과 이재용 등 사이에서 뇌물이 마지막으로 수수된 2016년 7월 26일 이후에도 적어도 당초 합의한 2018년 아시안게임 때까지는 정유라에 대한 승마 지원을 목적으로 액수 미상의 뇌물을 수수하겠다는 확정적인 의사 합치가 있었다고 판단된다"며 액수 미상의 뇌물수수약속 부분을 추가로 인정했다. 또 살시도 등 말 3마리의 소유권이 최씨에게 넘어간 점은 인정했으나, 말 보험료 2억여원에 대해서는, "보험계약이 삼성전자 명의로 체결되었고, 보험계약상의 보험이익이 삼성전자에서 최서원에게 이전되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며 뇌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승마지원 관련 뇌물액은 1심의 72억 9427만원보다 2억여원이 줄어든 70억 5281만원만 인정되었으나, 삼성의 총 뇌물액수는 영재센터 뇌물액 인정에 따라 약 14억원이 증가했다.
재판부는 양형와 관련, "피고인의 범행으로 말미암아 헌정사상 초유의 '탄핵 결정으로 인한 대통령 파면'이라는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민과 우리 사회 전체가 입은 고통의 크기는 이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그럼에도 피고인은 범행을 모두 부인하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최서원에게 속았다거나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 등이 행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등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그 책임을 주변에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고, 나아가 피고인은 정당한 이유 없이 법정 출석을 거부함으로써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하여 실체적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기대하는 국민의 마지막 여망마저 철저히 외면하였다"고 중형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은 대기업 총수들과 단독 면담이라는 은밀한 방법을 통해 삼성그룹과 롯데그룹으로부터 합계 150억원(이중 롯데그룹 70억원은 반환)이 넘는 뇌물을 수수하였고, SK그룹에 대하여는 89억원을 뇌물로 요구하였으며, 더욱이 피고인은 위와 같은 뇌물과 관련하여 대기업 총수들로부터 부정한 청탁을 받기도 하였다"며 "이와 같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부도덕한 거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하고 시장경제 질서를 왜곡시키는 것으로 이를 바라보는 국민에게 심각한 상실감과 함께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불신을 안겨주었다"고 말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