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현아 변호사]
상표권도 다른 지식재산권과 마찬가지로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각 나라의 국내에서만 효력이 있다. 이러한 원칙에 의하면 해외의 적법한 상표권자의 상품(진정상품, genuine goods)을 국내 상표권자 또는 전용사용권자의 허락 없이 수입하는 경우는 당연히 상표권 침해행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해외의 상표권자와 국내의 상표권자가 동일인인 경우에도 위와 같은 수입행위를 상표권 침해행위로 보아 금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여기에서 비롯된 논의가 바로 진정상품의 병행수입의 문제이다.동일상표에 대한 국내외의 상표권이 동일인에게 속한 경우에는 병행수입을 허용하는 것이 국제적 추세이며, 오늘날 속지주의를 근거로 하여 진정상품의 병행수입을 전면적으로 불허하는 예는 없다. 오히려 진정상품의 병행수입을 인정하되, 어떠한 이론으로 어떤 범위에서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 논의되고 있다. 우리 법원에서는 어떠한 조건 하에 진정상품의 병행수입을 인정하고 있을까.
대법원은 '폴로' 상표의 국내 전용사용권자가 그 등록을 마친 후 폴로 상표가 부착된 의류를 국내에서 제조 · 판매하면서 많은 비용을 들여 그 제품에 대한 선전 · 광고 등의 활동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위 전용사용권자의 허락 없이 국외에서 폴로 상표가 부착된 의류를 수입해온 사안에서, 국외에서 판매되는 같은 상표가 부착된 의류 중에는 미국 외에 인건비가 낮은 제3국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으로 제조되어 판매되는 상품들도 적지 않고, 국내 전용사용권자와 폴로의 상표권자가 동일인이라거나 같은 계열사라는 등의 특별한 관계가 없다면, 국외에서 제조 · 판매되는 상품과 국내 전용사용권자가 제조 · 판매하는 상품 사이에 품질상 아무런 차이가 없다거나 그 제조 · 판매의 출처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고, 또한 국외 상표권자와 국내 전용사용권자가 공동의 지배통제 관계에서 상표권을 남용하여 부당하게 독점적인 이익을 꾀할 우려도 적다고 할 것이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이른바 진정상품의 병행수입이라고 하더라도 국내 전용사용권을 침해하는 것으로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대법원 1997. 10. 10. 선고 96도2191 판결).
또한 이태리인 상표권자로부터 전전하여 일본 내에서의 생산, 판매를 위한 독점적 실시권을 부여받은 회사가 위 계약을 위반하여 한국의 수입업자에게 해당 상표의 제품을 수출한 사안에서는, 일본국의 국내법에 따라 적법하게 표장이 부착되어 판매된 상품은 일본국 내에서는 진정상품으로 인정된다고 할지라도, 일본국 내에서만 판매하기로 한 약정을 위반하여 그 국경을 넘어 대한민국으로 수출된 것이라면, 그 상품은 적어도 대한민국 내에서는 진정상품으로 보기 어렵다고 하여 진정상품의 정당한 병행수입행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다(대구고법 2002. 8. 2. 자 2001라61 결정).
한편 '버버리' 상표가 부착된 진정상품을 병행수입한 사안에서 대법원은 병행수입 그 자체는 위법성이 없는 정당한 행위로서 상표권 침해 등을 구성하지 아니하므로 병행수입업자가 상표권자의 상표가 부착된 상태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행위는 당연히 허용되나, 병행수입업자가 적극적으로 상표권자의 상표를 사용하여 광고 · 선전행위를 한 것이 실질적으로 상표권 침해의 위법성이 있다고 볼 수 없어 상표권 침해가 성립하지 아니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용태양 등에 비추어 영업표지로서의 기능을 갖는 경우에는 일반 수요자들로 하여금 병행수입업자가 외국 본사의 국내 공인 대리점 등으로 오인하게 할 우려가 있으므로, 이러한 사용행위는 부정경쟁방지및영업비밀보호에관한법률 제2조 제1호 (나)목 소정의 영업주체혼동행위에 해당되어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한바 있다(대법원 2002. 9. 24. 선고 99다42322). 위 사안에서 대법원은 사무소, 영업소, 매장의 외부 간판 및 명함은 영업표지로 사용한 것이어서 해당 표장의 사용이 허용될 수 없다고 하였다.
결국 진정상품의 병행수입이 적법한 것으로서 인정되는지 여부는 문제가 된 상품이 상표권자에 의하여 적법하게 상표가 부착된 진정상품인지, 국내외의 상표권자가 동일인이거나 계열사인 등으로 법적 · 경제적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국외 상표권자와 국내 상표권자가 공동의 지배통제 관계에서 상표권을 남용하여 부당하게 독점적인 이익을 꾀할 우려가 있는지, 해당 상품이 국내 일반 수요자들에게 상품의 출처나 품질에 관한 오인 또는 혼동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지, 해당 상표의 사용 태양에 비추어 영업표지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 제반 사정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하겠다.
민현아 변호사(법무법인 다래, mha0102@darae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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