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희기 교수]
인권의 시각에서 볼 때 ‘군정법령 제176호 형사소송법의 개정’은 미군정기간동안 남한에서 일어났던 사건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다. 많은 한국인들이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구도 하에서 미국이 남한지역에서 보여준 패권주의적 세계전략과 그로부터 유래하는 미군정의 남한에서의 거친 활동을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각에 동의하는 미국인도 있다.
그러나 미군정은 긍정적 측면도 보여주고 있었다.
제176호의 입안과 공포는 그러한 긍정적인 측면의 현저한 사례에 속한다.
미군정이 진주하면서부터 20세기 이후 미국인들이 자주 사용하기 시작한 ‘민주주의’(democracy)와 ‘권리장전’(bill of rights), ‘법의 지배’(rule of law), 인신보호법(habeas corpus) 등의 시민적 민주주의의 핵심개념들이 한국의 법률가들에게도 수용되기 시작했다.
이런 용어들은 이전의 일제강점기에는 법학자나 법률가가 즐겨 사용하던 용어들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경성지방법원 예심판사였던 藤井尙三이 저술한 《朝鮮 刑事訴訟法講義 全》(京城, 文林堂, 1936)이라는 책이나 경성 복심법원 검사장이었던 玉名友彦이 저술한 《朝鮮刑事令 釋義》(京城, 大洋出版社, 1944)에는 단 한번도 위와 같은 용어들이 사용되지 않았다.
이 두 책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의 형사절차에 관한 대표적인 문헌들이었다.
제176호는 형사소송절차, 특히 수사절차상의 강제처분영역에서 위와 같은 시민적 민주주의의 중심개념들을 시민적 민주주의의 구상이 전무하였던 종래의 식민지적 형사절차 풍토에 삽입시키려는 입법상의 시도였다.
당시의 상황에서 제176호의 입안과 공포는 미군정당국과 한국인 사법관 실무가들의 합작품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제176호의 제정방향에 관하여 미군정당국은 좀더 미국적 이념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사법관 실무가나 검찰관들은 좌익세력의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에 우익적 국가체제를 유지하려면 적극적인 범죄통제정책이 불가피하다는 현실론에 기초하여 제176호가 급진적인 개혁이 되지 못하도록 저지하였다.
인권에 관한 국제적인 추세에 비추어 볼 때 176호의 모습은 현저히 미온적인 것이었다.
지극히 파괴적이었던 한국전쟁의 폐허 하에서 1954년에 제정된 신형사소송법은 제176호가 추구한 미온적인 규범목표마저 한 단계 후퇴시켰다.
구속적부심사청구대상 사건의 현저한 축소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1960년대에 ‘176호의 정신’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62년 12월 26일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 제10조 제5항은 "私人으로부터 身體의 自由의 不法한 侵害를 받은 때에도 '法律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救濟를 法院에 請求할 權利를 가진다"고 규정하여 민사구금에 대하여도 구속적부심사청구를 가능하게 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로 마련하였고 1969년 7월 9일 신민당이 인신보호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다수 여당은 이 법안의 심사를 회피하여 1971년 6월 30일 국회의원의 임기 만료로 이 법안은 자동폐기되었다.
신민당이 제출하였던 인신보호법안은 일본의 인신보호법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 한국의 형사절차법과 법현실은 인권적 측면에서 볼 때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이 시기에는 구속적부심사청구제도 자체가 폐지되었거나 유명무실화 되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근의 이른바 ‘민주화 국면’에서 진행된 형사소송법 개정논의에서도 제176호의 논의단계에서 전개된 논변들이 거의 그대로 반복되는 것을 볼 때 한국현대형사사법사에서 48년이라는 세월이 그다지 긴 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다.
2004년은 176호가 공포 · 시행된 지 56년째,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 · 시행된 지 50년 째 되는 해이다.
1954년 형사소송법으로 축소된 인신보호법을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야 국제기준에 걸맞게 손질하려고 한다.
새로 제정되는 ‘한국형 인신보호법’에는 최소한 176호가 담았던 내용이 담겨야 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민사문제로 불법 ·부당하게 구금당하고 있는 민사피구금자에 대한 구속적부심사 청구가 가능하게 하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
현행 헌법 제12조 제6항은 “누구든지 逮捕 또는 拘束을 당한 때에는 適否의 審査를 法院에 請求할 權利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현행 형사소송법이 適否審査 청구권자를 ‘형사피의자’로 한정한 것은 헌법위반이다.
체포 · 구속적부심사를 규정하고 있는 형사소송법 제214조의2에 민사문제로 불법 · 부당하게 구금당하고 있는 민사피구금자에 대한 구속적부심사까지 포괄하기에는 기술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민사피구금자에 대한 구속적부심사절차는 별도의 ‘한국형 인신보호법’의 제정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둘째, 민사피구금자에 대한 구속적부심사 청구권자에 검사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이나 국가인권위원회 소속 공무원을 포함시켜야 한다.
인권옹호는 검사의 중요직무의 하나이며 국가인권위원회는 바로 이런 일을 하도록 설립된 기구이기 때문이다.
셋째, 불법 ·부당하게 구금당하고 있는 민사피구금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부심사 청구를 고의 또는 과실로 해태하는 검사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이나 국가인권위원회 소속 공무원), 이유 있는 신청을 부당하게 각하 · 기각하는 판사에 대한 제제조항을 두어야 한다.
넷째, 별도의 인신보호법을 제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때 심사청구의 대상에 형사문제로 불법 · 부당하게 구금당하고 있는 형사피구금자를 포함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현행 형사소송법에 대하여도 ‘屋上屋’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어서 심사청구의 대상에 형사피구금자를 포함시키는 방안에 대하여는 저항이 거셀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형사피구금자의 청구적격으로 보충성 요건을 추가하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이 11월15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개최한 "인신보호법 제정을 위한 공청회"에서 연세대 법학부의 심희기 교수가 주제발표한 내용입니다. 발표 내용 전문은 리걸타임즈 자료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연세대 법학부 교수(hgsim@dragon.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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