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진영 변호사]
김평우 대한변협회장은 2009년 선거 당시 판결문 정보공개를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판결문 공개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이제 국민들과 재야 법조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판결문 전면공개를 위해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신호를 주목하며, 왜 판결문을 공개해야 하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대한민국 헌법 제109조는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 다만, 심리는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할 염려가 있을 때에는 법원의 결정으로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의 심리는 재판과정, 즉 변론(민사소송, 행정소송)과 공판(형사소송)과정에서 주장되거나 제출된 증거를 의미하는 것이고, 판결은 그러한 재판과정을 거쳐서 법관이 내린 결론을 뜻한다.
변론, 공판 비공개 규정은 있어
헌법 제109조는 재판의 심리의 경우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안녕질서, 선량한 풍속을 위해 필요하다면 비공개로 할 수 있는 여지를 두었지만 재판의 판결에 대해서는 무조건 공개를 명령하고 있다. 헌법 제109조에 따라 민사소송법 제153조에 변론의 비공개를, 형사소송법 제51조에 공판의 비공개를 결정할 수 있는 근거규정을 두고 있지만 판결을 공개하지 않도록 한 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우리 법원의 현실은 어떠한가. 소송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일부의 판결만공개하며, 1, 2심 판결문을 전면공개하라는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묵살해 왔다.
사법불신에 뿌리 둔 재판공개원칙
재판공개의 원칙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문명국가라면 모두 채택하고 있는 제도이다. 각국이 재판공개원칙을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국가가 재판절차를 악용하여 국민에게 부당한 권력을 행사했던 역사적인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각국의 헌법제정권자들이 사법절차를 투명하게 공개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결국 재판공개원칙은 국민의 사법불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서구의 전통을 받아들여 헌법과 법률은 재판 심리와 판결을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헌법규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과 같은 시국사건에서 이른바 '사법살인'을 저질렀던 치욕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국민들의 가슴에는 불과 20년 전까지도 사법절차의 형식을 빌려 자행되었던 국가의 부당한 권력행사가 여전히 '살인의 추억'처럼 깊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네차례의 평화적 정권교체에 성공한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법불신은 해소되었는가. 아직도 우리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전관예우, 유전무죄, 무전유죄 등의 용어부터 최근의 튀는 판결 논란을 보면 안타깝게도 사법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여전하다.
오히려 불신의 원인이 과거에는 권력과 같은 외부세력이었다면 지금은 사법부 내부적 요소가 많아 졌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 졌다고 할 수 있다.
정보에 대한 책임도 떠안아야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독점하는 경우 정보를 보유하고 있는 자는 정보로부터 창출되는 이익을 향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그 정보에 대한 신뢰성과 정당성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떠안아야 하는 부담을 져야 한다.
우리나라 법원이 1, 2심 판결문을 이용하여 국민들의 사생활을 감시한다거나 아니면 영리목적으로 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판결정보 독점으로 인해 얻는 현재적 이익은 특별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소송에 휘말린 수많은 국민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건의 선례에서 당사자는 어떤 주장을 했었는지, 결과는 어떠했는지, 과연 자신의 사건의 결론이 선례의 결론과 비교하여 부당하지 않은지, 재판장이 상대방 변호사의 청탁에 휘둘린 것은 아닌지에 대해 근원적인 의심을 하게 마련이다.
사실상 구속력 발휘하는 판례
소송에서는 웬만한 주장이나 증거보다 유사사건의 판례를 제출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든든한 공격 · 방어방법이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원칙적으로 선례의 구속력이 없지만 법관이 선례와 배치되는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반대논리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상 구속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송에서 긴요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자료가 법원의 전산망 안에서만 잠자게 하고, 법원내부 인사들에게만 공개하는 것은 국민들이 다른 사람이 눈, 비를 헤치면서 앞서가며 만들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가지 못하고, 언제나 새로 길을 내며 가야하는 고통을 감수하도록 강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판결문을 공개하는 것은 법원이 특히 패소한 당사자들이 제기하는 불필요한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지름길도 될 수 있다.
혹자는 판결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대다수 국민과는 무관한 일이고 이로 인한 최대의 수혜자는 변호사들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굳이 반박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엉터리 주장이지만, 이러한 논리가 먹히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잠시 언급해 보기로 한다.
변호사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소송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변호사들이 소송을 할 때에는 소송을 맡긴 의뢰인이 있게 마련이고, 그 의뢰인들은 다름 아닌 우리 국민들이다. 국민인 의뢰인들의 이해와 소송대리인인 변호사들의 이해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닌 것이다.
본인 직접소송에 도움
또 우리나라는 변호사 강제주의를 채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당사자 본인이 직접 소송을 진행하는 비율이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나라이다. 이렇게 변호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유사사건의 판례는 어떤 도움과도 견줄 수 없는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이들 역시 국민 아닌가.
변협은 판결문 공개에 필요한 절차와 방법을 규정한 가칭 '사법정보공개법'을 만들어 국가로부터 예산을 배정받는 방안을 제시하고 국회와 정부를 설득해 나갈 예정이다.
'사법정보공개법' 만들어 추진
판결문 공개로 인해 재판당사자들의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주장도 있다. 어차피 법정에 가면 국민 누구라도 원고, 피고의 실명, 그 사건의 쟁점은 물론 판결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원, 피고의 민망한 사생활의 모든 내용을 들을 수 있다. 어째서 이것이 사생활침해라는 문제제기는 없는가. 바로 이것이 재판공개원칙으로 인한 불가피한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는 아무런 제한없이 공개되는 내용이 판결문으로 걸러져 공개되면 사생활 침해가 된다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사건 중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이 보장될 필요가 있는 사건도 있을 것인데, 이 경우에는 당사자의 신청이나 법원이 직권으로 비공개결정을 하여 익명화 처리를 거쳐 공개하면 되는 것이다.
카프카의 '심판'의 주인공 K는 도대체 자신이 왜 기소되었는지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영문을 모른 채 헤매다가 변호사를 찾는다. 하지만 그 변호사 역시 사건의 내용을 파악할 방법을 모른 채 재판관과의 인적 관계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이고, 그러한 변호사를 보며 K는 절망을 느낀다.
지금 우리의 시대는 K의 시대보다 부조리, 불합리가 없어야 한다고 믿고 싶지만 과연 그러한가.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법원에 알음알음 부탁으로 판결문을 빼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여부만으로도 경쟁력을 과시할 수 있는 우리 법조사회의 모습에서 어쩐지 K가 살던 부조리한 시대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필자 개인만의 과민함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무쪼록 사법정보공개법이 제정되어 국민은 번거로움과 답답함에서, 법원은 의심의 속박에서 속히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장진영 변호사(대한변협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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