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조직의 의뢰인 줄 모른채 보이스피싱 중계기를 설치 · 관리했더라도 전기통신사업법이 금지하는 '타인통신매개'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타인통신매개행위의 '고의'는 타인이 대상 통신을 범죄에 이용한다는 것까지 인식할 것을 요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퀵배달원인 A(55)씨는 퀵배송 의뢰인으로부터 휴대전화 공기계에 유심을 꽂아 개통해주면 1대당 3,000원, 그렇게 개통된 유심을 통신중계기에 꽂아 주면 1회 출동당 35,000원을 주겠다는 의뢰를 받고, 2023년 3월 2일 동대구고속버스 터미널 수화물센터에서 택배로 배송되어 온 중계기를 건네받아 대구 중구에 있는 고시원에서 위 중계기 1대, 유무선 공유기 1대를 설치하여 인터넷망에 연결한 뒤 3월 22일까지 퀵배송 의뢰인의 지시에 따라 유심을 중계기 특정 번호에 꽂았다가 다른 번호로 옮겨 꽂는 등의 작업을 했다. 이후 중계기를 다른 장소로 옮겨달라는 지시를 받아 3월 22일 대구 동구에 있는 건물로 중계기 1대, 유무선 공유기 1대를 옮겨 설치하고, 인터넷망에 연결한 뒤 마찬가지로 위 퀵배송 의뢰인의 지시에 따라 같은 해 4월 4일까지 유심을 옮겨 꽂는 등의 작업을 했다. 그러나 A씨에게 작업을 의뢰한 사람은 보이스피싱 조직원이었다. 검찰은 A씨의 행위가 전기통신사업법이 금지하는 '타인통신매개'에 해당한다고 보아 기소했다.
전기통신사업법 30조는 "누구든지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하여 타인의 통신을 매개하거나 이를 타인의 통신용으로 제공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위반하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97조 7호).
1심에 이어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와 관련되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검사의 상고로 열린 상고심(2024도7105)에서 대법원 제2부(주심 권영준 대법관)는 9월 13일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대구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전기통신사업법 제30조의 '타인의 통신을 매개'한다는 것은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 사이의 통신을 연결해 주는 행위를 의미하고, 위 조항의 문언과 입법취지에 비추어 볼 때 매개되는 통신의 당사자가 통신의 매개를 요청하거나 통신 매개 행위에 관여하였다 하더라도 위 조항 본문이 정한 '타인의 통신을 매개'하는 행위에 해당한다(대법원 2021. 7. 29. 선고 2020도16276 판결 참조)"고 전제하고, "이러한 타인통신매개로 인한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죄의 고의는 전기통신사업자가 제공하는 전기통신역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들 사이의 통신을 연결해 준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요할 뿐, 더 나아가 통신이 매개된 타인이 그 통신을 범죄에 이용한다는 것까지 인식할 것을 요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보이스피싱 조직은 조직원을 통하여 피고인에게 통신중계기, 통신공유기, 휴대전화 공기계, 휴대전화 유심 등을 제공하였고, 피고인은 조직원의 지시를 받아 1개월 이상의 기간 동안 장소를 옮겨가며 위와 같이 제공받은 통신중계기와 통신공유기를 연결하고 휴대전화 공기계에 휴대전화 유심을 꽂아 개통한 후 그 유심을 통신중계기에 수시로 꽂았다가 빼내는 등 관리하였으며, 조직원은 피고인이 관리한 유심을 이용하여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전송하였다"고 지적하고, "피고인이 조직원과 공모하여 조직원이 피고인 관리의 유심을 이용하여 보이스피싱 피해자들과 전화를 하거나 문자메시지를 전송할 수 있도록 매개함으로써 고의로 전기통신사업법 제30조에서 금지하는 타인통신매개행위를 하였다고 인정할 여지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피고인이 조직원으로부터 제공받아 설치한 통신중계기에는 유심을 꽂는 포터가 16개나 있었고, 피고인은 체포될 당시 51개의 유심을 소지하고 있었다.
대법원은 "그럼에도 타인통신매개로 인한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죄의 고의가 인정되려면 통신이 매개된 타인이 그 통신을 범죄에 이용한다는 것까지 인식하였을 것을 요한다는 전제 하에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한 원심의 판단에는 타인통신매개로 인한 전기통신사업법 위반죄에서의 고의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