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성이 약 14년 전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함께 집단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대법원은 그러나 유서의 신빙성이 낮아 공범으로 지목된 친구 3명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쓸 수 없다고 보았다.
A는 2021년 3월 서울 양천구 아파트에서 자필 유서를 남기고 숨졌다. 유서에는 "너무나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중학교 3학년이던 2006년 친구 3명과 함께 중학생 후배 B양에게 술을 먹인 뒤 성폭행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A의 유서를 계기로 수사가 시작되었고, 검찰은 피해자와 피해자의 모친 등의 진술을 토대로 A의 친구 3명을 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의 쟁점은 A의 유서를 형사재판의 증거로 쓸 수 있는가 여부였다. 형사소송법 314조는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진술을 요하는 자가 사망 · 질병 · 외국거주 · 소재불명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진술할 수 없는 때에는 그 조서 및 그 밖의 서류를 증거로 할 수 있다. 다만, 그 진술 또는 작성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졌음이 증명된 때에 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심은 A가 유서를 작성할 당시 심리상태가 불안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유서를 증거로 쓸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유서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고 보고 친구 3명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 제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4월 12일 다시 판단을 뒤집어 유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해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보냈다(2023도13406).
대법원은 먼저 "형사소송법 제314조는 원진술자 또는 작성자가 사망 · 질병 · 외국거주 · 소재불명 등의 사유로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출석하여 진술할 수 없는 경우에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졌다는 점이 증명되면 원진술자 등에 대한 반대신문의 기회조차도 없이 증거능력을 부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다 중대한 예외를 인정한 것이므로, 그 요건을 더욱 엄격하게 해석 · 적용하여야 한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형사소송법 제314조에서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졌음에 대한 증명'은 단지 그러할 개연성이 있다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합리적 의심의 여지를 배제할 정도, 즉 법정에서의 반대신문 등을 통한 검증을 굳이 거치지 않더라도 진술의 신빙성을 충분히 담보할 수 있어 실질적 직접심리주의와 전문법칙에 대한 예외로 평가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대법원 2022. 3. 17. 선고 2016도17054 판결 등 참조)"고 밝혔다.
이어 "A가 자신의 범행을 참회할 의도로 유서를 작성하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즉, 허위 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작성 동기나 경위가 뚜렷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나아가, 유서에는 피고인들의 실명이 기재되어 있고, 공소시효가 도과되지 않았다는 언급도 있다. 망인이 반성과 참회보다는 피고인들에 대한 형사처벌을 목적으로 유서를 작성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런 경우라면 유서에 진실만이 기재되어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또 "유서는 사건 발생일 즈음이 아니라 사건 발생일로부터 무려 14년 이상 경과된 이후 작성되었다. 사람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억이 희미해져 오류가 발생할 수 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망인이 유서의 내용처럼 오랜 시간 상당한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기억이 과장되거나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망인이 자살 직전 A4 용지 1장 분량으로 작성한 이 사건 유서는 그 표현이나 구체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유서의 내용이 객관적 증거, 진술증거로 뒷받침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유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이를 유죄의 주요 증거로 삼아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한 원심의 판단에는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판시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