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가 업무상 재해를 인정받았다고 해서 꼭 회사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업무상 재해의 인정 기준이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는 기준보다 넓기 때문이다.
1995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해 선박블록의 용접공으로 근무하던 A씨는 2005년 7월 용접작업 중 탈수 현상과 머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기억력저하를 호소한 뒤 한 달 정도 휴직을 하다가 다시 복직해 약을 복용하면서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후 기억력저하, 느려진 동작, 횡설수설하는 언어 때문에 근무에 지장이 있어 2006년 3월 다시 휴직한 후 복직하지 못한 채 이듬해 퇴사했다.
A씨는 2008년 병원에서 파킨슨증 진단을 받자 요양신청을 했으나 불승인 처분을 받자 소송을 내 "파킨슨증은, '근로자가 망간 또는 그 화합물에 노출되는 업무에 2개월 이상 종사하거나 종사한 경력이 있고, 파킨슨증후군 증상 또는 소견이 나타나면 업무상 질병으로 본다'고 규정한 구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에 따른 업무상 질병에 해당하므로 요양불승인처분은 위법하다"는 판결을 선고받아 확정되었다. A씨는 이후 2015년 3월 사망했다. 이에 A씨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아 A씨에게 파킨슨증이 발생했으니 손해를 배상하라"며 현대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또 용접봉 제작사인 현대종합금속을 상대로도 제조물책임법 또는 불법행위책임에 따른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가 두 소송 모두 원고 패소 판결하자 원고들이 상고했다. 현대중공업 상대 소송에서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A가 취급한 용접봉 등 용접제품에 망간이 일부 함유되어 있고, 일부 작업자에 대해 노출기준치 초과사실이 확인되므로 보호의무 위반은 인정된다"면서도 "그러나 제출된 의학적 소견들은 증상의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거나 가능성을 추정한 것에 불과하여 보호의무 위반과 파킨슨증 발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특히 "행정소송법 제30조 제1항은 '처분 등을 취소하는 확정판결은 그 사건에 관하여 당사자인 행정청과 그 밖의 관계행정청을 기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을 뿐이므로, 행정소송의 확정판결에 법원을 기속하는 효력까지 있다고 볼 수 없고, 행정처분에 공정력이 있다고 하여, 거기에 법원을 기속하는 효력까지 있다고 볼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현대종합금속 상대 소송에서도 "망간은 용접 강도를 유지하는 필수 원소이고 대체가 불가능하여 제조상 · 설계상 결함이 있다고 볼 수 없고, 용접봉 포장에 증기 흡입의 위험성을 인식할 수 있는 표시가 되어 있어 표시상의 결함이 있다고 볼 수도 없다"며 "제조물책임을 인정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불법행위책임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 제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도 8월 25일 원고들의 상고를 기각, 원심을 확정했다(2017다267774, 2018다207601).
대법원은 "산재보험법상 상당인과관계는 불법행위에서의 상당인과관계보다 인정범위가 넓으므로 행정소송에서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었다는 점만으로 민사상 손해배상책임을 반드시 부담하는 것이 아니다"고 전제하고, "보호의무 위반과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할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아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 제1심판결을 그대로 유지한 원심에 업무상 재해의 인정기준, 행정처분의 공정력 및 확정판결의 기속력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없다"고 판시했다.
손영섭 변호사가 현대중공업을, 법무법인 세창이 현대종합금속을 각각 대리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