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신문이 끝나자 판사가 구형도 최후진술도 듣지 않고 판결 선고 기일을 지정했다. 판사가 화의사건을 종결하면서 기업의 노 회장을 불러 셔츠 바람으로 큰 은혜라도 베푸는 양 훈계했다. 판사 경력 24년, 변호사 경력 17년의 정인진 변호사에겐 한국 법원의 '이상한 재판'에 대한 기억이 많다.
최근 단행본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를 펴낸 그가 이상한 재판장을 만나고 와서 한탄을 늘어놓자 듣고 있던 대학 동기 변호사가 한마디 했다. "너는 판사가 재판을 이상하게 하면 불만을 터뜨리는데, 그러면 안돼. 그런 판사를 이용해서 돈을 벌 생각을 해야지. 다른 변호사들한테는 그렇게 해도 너한테는 잘하게 할 방법을 찾으란 말이야. 아니면 그 판사한테 누가 약인지 찾아내든지. 그게 돈이 되는 거야."
'우리 사법의 우울한 풍경'이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우리 사법의 현주소를 진단하며 사법의 올바른 역할을 촉구하는 내용의 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법철학 교양서적을 마주한 듯 중후한 울림이 있는 글이다. 결코 가볍지 않게, 사법의 여러 측면에 대해 본인의 실제 경험과 깊은 생각을 담아 문제를 제기하고 해법을 추구하는 본격적인 법조 중수필이다.
그가 제시하는 '법관들에게 바라는 몇 가지'의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정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7기로 수료했으며, 1980년 판사로 임관하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마지막으로 2004년 법원을 떠났다. 현재 법무법인 바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법조윤리를 강의했으며, 사법 과정론에 관심이 많다.
◇법 기속성의 긍정=오늘날 법관들이 조세법률주의에 대한 의식이 과연 헌법 이념에 따른 것인지 의심스러운 경우를 자주 본다. 조세 소송을 해보면 조세 법규로 봤을 때 명확하지 않거나 그대로는 과세를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곳에서 법관이 과세 관청 편을 드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납세자들은 법원에 가봤자 별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어떻게 해서든 조세심판원에서 승부를 내려고 한다. 권리 구제자로서 법원의 역할이 이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축소된 것이다.
◇법의 도구성에 대한 인식=법은 도구다.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불법이 합법이 되고 합법이 불법이 되는 것을 우리는 드물지 않게 목격한다. 법관은 이런 점도 배려하고 고민해야 한다. 법에 정해진 바와 다르니 잘못된 것이라는 등식으로 세상사를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법정의를 세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법을 도구가 아닌 실체적 개념으로 알면서 물신적 사고에 빠지면 이런 함정에 드는 것이 아닐까.
내가 배석판사 노릇을 할 때 모셨던 어느 부장판사는, 민사소송법상의 세세한 문제로 당사자에게 불편한 일이 생기거나 당사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은 애로 사항이 생겨 내가 질문하면 늘 이렇게 대답했다. "해줍시다. 소도 취하하는데, 뭐." 당사자가 소도 취하할 수 있는 것이 민사소송법의 기본 도구인데, 그보다 작은 일에 왜 그 사람들에게 안 된다고 하여 불편을 주냐는 말이었다.
상식과 법리의 괴리는 정말 피해야 할 일이다. 판례를 보면 단체 등의 회의에서 일어나는 의결의 성립과 유효에 관해 복잡한 요건을 설명해놓은 것이 많다. 회사 같은 영리단체에서는 사람들이 이악스럽게 행동하게 마련이니까 그런 엄격한 요건을 따지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비영리단체만 해도 벌써 요건을 제대로 갖추어 가면서 회의를 하는 일이 드물다.
고등법원에서 배석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종중의 의결에 관한 사건을 담당해 합의를 하는데, 내가 판례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하면서 무효라는 의견을 내자, 듣고 있던 부장판사가 웃으며 말했다. "정 판사, 종중이 뭔지 아나? 집안의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모여서 점심이나 자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나 나누는 것이네." 나중에 그분은 대법관이 되었는데, 제발 그런 혜안을 가진 법관이 높이 되었으면 좋겠다.
◇법리와 판례 맹종 문제=법관에게는 또한 법리와 판례를 맹종하는 문제가 있다. 물론 법리를 따르고 판례를 따르는 것은 일단 옳은 일이다. 그러나 법리에서는 얼마든지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고, 판례란 반드시 그 판례가 생겨난 사건의 사실관계를 놓고 보아야 판시 범위나 사정거리를 알 수 있다.
나 자신의 죄과를 하나 밝히겠다. 법관 재직 시절 어업권의 배후지에 관련된 사건을 맡게 되었는데, 고생 끝에 그 사건에 적용하기에 맞춤한, 원고 청구 기각으로 결론이 난 판례를 하나 찾았다. 문제는 판례가 나온 사건의 사실관계가 내가 담당한 사건의 사실관계와 거의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면에서 일부 달랐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내 고민은 그 사건의 사실관계를 어떻게 판례가 나온 사건의 사실관계와 같도록 짜맞추는가에 집중되었다. 사실이 다르면 그 사실관계에는 어떻게 법을 적용해야 옳은 것인지를 고민해야 할텐데, 반대로 결론부터 내려놓고 사실관계를 맞추려고 시도한 것이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 사건 결론을 내기 전에 인사 발령이 났는데, 만약 판결을 썼다면 보나마나 판례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의 사실은 "~에 부합하는 증거는 믿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만한 자료가 없어…"라는 이유를 들어 잘라냈을 것이다. 그래야 두부모 자르듯이 그 사실관계가 판례와 같은 것으로 딱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법경제학적 시각의 필요성=어느 해 일간 신문에 과거 총리를 맡은 이가 법관들에게 한 강연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법관들도 사건을 정무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정무적 판단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이해하기로 그의 발언은 법률적으로만 사건을 보지 말고 사건이 가져올 사회적 파급 효과와 작용에 대해 사고한 다음에 판결의 결론을 내려 달라는 취지가 아닌가 싶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법적 판단과는 다른 사고방식에 관한 주문이고, 법이 아닌 다른 것까지 고려하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조금 관점을 달리하여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임진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축조한 댐이 무너져서 인근 지역 주민들이 손해를 입었다고 하여 그 배상을 구하는 소송에서 피고 건설사를 대리한 적이 있다. 피고의 주장으로는 댐이 무너질 당시의 단위 시간당 강수량은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기상 관측이 시작된 이래 최대치였고, 과거의 기록을 대조해보더라도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많았던 것이라고 했는데, 그 주장의 사실적 기초가 옳다고 보았을 때, 댐을 건설하는 사업을 하면서 아직 관측되고 기록되지 않은 정도의 강수량까지도 고려하여 댐의 규모와 강조를 설계하고 시공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그런데 항소심에서는 그저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무너졌으니 과실이 있다는 이유로 원고들인 주민들의 청구를 인용하는 결론이 났고, 대법원 판결은 "원심의 사실 인정과 판단은 옳고…"라는 상투적인 것이었다.
이런 유의 사건에서는 단순히 누가 이기도록 판결해주어야 할까 생각하는 것을 넘어, 어떤 판단이 경제 정책이나 사회 정책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효과가 있는지 검토하면서, 법원과 법관이 지도적 원리를 제시하는 역할을 할 수는 없을까. 물론 이를 위해서는 당사자가 충분한 주장과 자료를 내놓아야 하지만, 주장이나 입증이 어떻든 간에 물을 막아야 할 댐이 무너져서 그로 인해 손해가 발생했으면 당연히 과실이 있는 것이니 배상을 하라는 식이 되어버리면, 법률가는 그야말로 판례나 찾는 율사가 되어버리지 않을지 모르겠다. 이런 문제에 대해 법관이 진지한 검토를 해보고 그 결론으로 판결을 내려야, 당사자들도 일면적이고 단편적인 사고방식을 접고 법적 문제에 대한 변론을 전체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리걸타임즈 김진원 기자(jwkim@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