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담보로 제공한 기계를 임의로 처분했다고 해도 배임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이 경우 채무자를 은행과의 신임관계에 기초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은 8월 27일 은행에 담보로 잡힌 기계를 은행의 허락 없이 양도했다가 배임 혐의로 기소된 황 모씨에 대한 상고심(2019도14770)에서 이같이 판시, 배임 혐의를 유죄로 판단해 다른 혐의와 함께 징역 6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배임 혐의는 무죄라는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되돌려보냈다.
부천시 원미구에 있는 합성수지 제조업체를 설립하여 회사의 지분 68%를 보유하면서 대표이사로서 근무해 온 황씨는 2015년 10월경 중국 법인에 대한 투자를 진행하면서 중소기업은행에 담보로 잡힌 레이저 가공기 2대를 은행의 허락 없이 이 중국 법인에 양도한 혐의(배임) 등으로 기소됐다. 황씨는 이에 앞서 2013년 9월 중소기업은행에서 10억원을 대출받으면서 회사 소유의 레이저 가공기 2대를 포한한 기계 17대에 관하여 근담보권설정계약을 체결하고 은행에 동산담보등기를 마쳐 주었다.
1심에 이어 항소심 재판부가 "피고인은 동산담보권 설정자인 회사의 대표이사로서 피해자 은행에 대한 채무 변제 시까지 그 담보물건인 기계들을 담보 목적에 맞게 보관하여야 할 임무를 부담하여 배임죄의 주체인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한다"며 배임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자 황씨가 상고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황씨를 은행과의 신임관계에 기초해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볼 수 없고 따라서 배임죄도 성립하지 않는다며 원심 판결을 뒤집었다. 정해원 변호사가 상고심에서 황씨를 변호했다.
대법원은 먼저 "배임죄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사무의 주체인 타인에게 손해를 가할 때 성립하는 것이므로 그 범죄의 주체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지위에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고, "여기에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하려면, 타인의 재산관리에 관한 사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타인을 위하여 대행하는 경우와 같이 당사자 관계의 전형적 · 본질적 내용이 통상의 계약에서의 이익대립관계를 넘어서 그들 사이의 신임관계에 기초하여 타인의 재산을 보호 또는 관리하는 데에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익대립관계에 있는 통상의 계약관계에서 채무자의 성실한 급부이행에 의해 상대방이 계약상 권리의 만족 내지 채권의 실현이라는 이익을 얻게 되는 관계에 있다거나, 계약을 이행함에 있어 상대방을 보호하거나 배려할 부수적인 의무가 있다는 것만으로는 채무자를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라고 할 수 없고, 위임 등과 같이 계약의 전형적 · 본질적인 급부의 내용이 상대방의 재산상 사무를 일정한 권한을 가지고 맡아 처리하는 경우에 해당하여야 한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채무자가 금전채무를 담보하기 위하여 그 소유의 동산을 채권자에게 동산 · 채권 등의 담보에 관한 법률에 따른 동산담보로 제공함으로써 채권자인 동산담보권자에 대하여 담보물의 담보가치를 유지 · 보전할 의무 또는 담보물을 타에 처분하거나 멸실, 훼손하는 등으로 담보권 실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더라도, 이를 들어 채무자가 통상의 계약에서의 이익대립관계를 넘어서 채권자와의 신임관계에 기초하여 채권자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따라서 이러한 경우 채무자를 배임죄의 주체인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고, 그가 담보물을 제3자에게 처분하는 등으로 담보 가치를 감소 또는 상실시켜 채권자의 담보권 실행이나 이를 통한 채권실현에 위험을 초래하더라도 배임죄가 성립하지 아니한다"고 판시했다.
김재형 대법관은 이에 대해 "동산담보에 있어서 담보약정을 이행할 의무가 채무자 자신의 사무라고 해서 동산담보권 설정 이후의 사무까지 동일하게 평가할 수 없고, 채권자가 동산 담보권을 취득한 다음 담보권설정자가 부담하는 담보물 보관 · 유지 의무 등은 담보권설정계약 당시와는 그 성질과 내용을 달리한다"며 "이러한 의무는 계약 당시의 단순한 채권적 의무를 넘어 동산담보권자의 담보물에 대한 교환가치를 보전할 의무로서의 내용과 성격을 갖기 때문에 배임죄에서 말하는 타인의 사무로 보아야 한다"는 상고기각 반대의견을 냈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 판결은 채무자의 동산담보권이 설정된 담보물에 대한 담보가치 유지 · 보관의무는 동산담보설정계약에 따른 의무로서, 그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채권자를 위하는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자신의 사무에 해당할 뿐 타인의 사무로 볼 수 없다는 것"이라며 "위와 같은 타인의 사무에 관한 해석을 통해 형벌법규의 엄격해석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사법(私法)의 영역에 대한 국가형벌권의 과도한 개입으로 인한 사적 자치의 침해를 방지한다는 데 이 판결의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