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자가 은행에 담보로 제공한 동산을 다른 사람에게 처분했더라도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왔다. 종전 판례를 변경한 것으로, 채무자를 배임죄의 주체인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로 볼 수는 없다는 취지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정희 대법관)은 2월 20일 은행에 양도담보로 제공한 골재생산기기 크라샤를 다른 사람에게 매각했다가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된 골재 도소매 업체 대표 권 모씨에 대한 상고심(2019도9756)에서 배임죄를 유죄로 인정한 부분을 깨고, 배임 무죄 취지로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권씨는 2015년 12월 1일 중소기업은행으로부터 1억 5000만원의 대출을 받아 시가 2억 9000만원 상당의 골재생산기기인 크라샤를 구입하면서 대출금을 완납할 때까지 이 크라샤를 은행에 양도담보로 제공했으나, 이듬해 3월 21일경 크라샤 중 일부를 한 회사에 5500만원에 매각하고, 사흘 후 나머지 일부를 또 다른 사람에게 1억원에 각각 매각하여 은행에 1억 5000만원 상당의 손해를 입힌 혐의(배임) 등으로 기소됐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양도담보에 제공한 동산을 매각한 경우 배임죄 성립을 인정하는 종전 판례에 따라 권씨에게 배임 유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채무자가 금전채무를 담보하기 위하여 그 소유의 동산을 채권자에게 양도담보로 제공함으로써 채권자인 양도담보권자에 대하여 담보물의 담보가치를 유지 · 보전할 의무 내지 담보물을 타에 처분하거나 멸실, 훼손하는 등으로 담보권 실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행위를 하지 않을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더라도, 이를 들어 채무자가 통상의 계약에서의 이익대립관계를 넘어서 채권자와의 신임관계에 기초하여 채권자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전제하고, "따라서 채무자를 배임죄의 주체인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고, 그가 담보물을 제3자에게 처분하는 등으로 담보가치를 감소 또는 상실시켜 채권자의 담보권 실행이나 이를 통한 채권실현에 위험을 초래하더라도 배임죄가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금전채권채무 관계에서 채권자가 채무자의 급부이행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금전을 대여하고 채무자의 성실한 급부이행에 의해 채권의 만족이라는 이익을 얻게 된다 하더라도, 채권자가 채무자에 대한 신임을 기초로 그의 재산을 보호 또는 관리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고 할 수 없고, 금전채무의 이행은 어디까지나 채무자가 자신의 급부의무의 이행으로서 행하는 것이므로 이를 두고 채권자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것으로 볼 수 없고, 따라서 채무자를 채권자에 대한 관계에서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대법원은 이와 달리 배임죄를 인정한 대법원 2011. 11. 22. 선고 2010도7923 판결을 비롯한 같은 취지의 대법원 판결들은 이 판결의 견해에 배치되는 범위 내에서 모두 변경하기로 했다.
김재형, 김선수 대법관은 이에 대해 "배임죄가 아니라 횡령죄가 성립할 수 있으므로, 이를 심리 · 판단할 수 있도록 원심을 파기하여야 한다"는 파기환송 별개의견을 냈다.
민유숙 대법관은 "채권자가 양도담보권을 취득한 이후에는 채무자는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에 있다고 보아야 하므로 배임죄가 성립한다"며 상고기각 반대의견을 냈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