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인터뷰=고려대 김인현 교수]"해상법 국제화, 해운 중흥이 평생의 소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의 김인현 교수는 외항선 선장으로 배를 타다가 뒤늦게 법학을 공부해 해상법 교수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법을 공부하기 전에 항해사와 선장으로 약 10년간 바다를 누빈 그는 해상법의 현장을 가장 잘 아는 학자 중 한 사람으로, 바다와 법을 연결시켜 한국 해상법의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리걸타임즈가 2018년 신년인터뷰로 김 교수를 만났다. 한 달 전쯤 자전적 수필집 《바다와 나》를 출간하기도 한 그와의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해상법과 바다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경북 동해안의 바닷가에서 태어나 두 번의 해양사고를 겪으며 해상법 학자로 이어진 그의 인생항로에 대해 들어보았다.-조금 있으면 로스쿨 7기가 졸업하고, 10기들이 입학하게 됩니다. 사법시험이 폐지되어 유일한 법조인 양성기관으로 자리를 잡게 된 로스쿨에 대한 평가부터 부탁드립니다.
"로스쿨엔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병존하고 있어요. 나는 무엇보다도 음지에서의 공부가 양지에서의 공부가 된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법대에서의 4년 공부를 마치고 절이나 고시원에서 2~3년을 더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하는 사람들이 많았죠. 사설학원도 다녀야 했고, 졸업생의 몇 % 이내만 사법시험의 관문을 통과했습니다.
고려대, 90등 이상 탈락자 없어
이에 반하여 로스쿨에서는 학교수업을 충실히 따라가기만 하면 변호사시험 합격이 보장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모두 학교에서 강의를 듣고 도서관 등에서 시험 준비를 합니다. 절이나 고시원 등에 갈 필요가 없어요. 고려대 로스쿨의 경우 첫 회 응시에 85% 정도가 합격하는데, 입학정원 120명 중에서 학교성적 90등 이상은 떨어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교성적대로 가는구나…어떻게 공부하면 된다는 예측이 가능한 시험이 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법조인 선발시험의 발전입니다. 물론 응시자가 늘어나며 전체 합격률이 낮아지는 것은 해소되어야 할 과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로스쿨에서 내걸었던 특성화교육은 활발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학생들 입장에서 변호사시험 합격이 우선이기 때문에 잘 되지 않고 있는데, 전체 로스쿨의 공통된 현상입니다. 그렇지만 고려대 로스쿨의 해상법 전공은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해상법 전공' 11명 로펌 등 진출
지금까지 모두 11명의 해상법 전공자가 해상로펌이나 해운회사 등에 초빙되어 변호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화우, 김앤장, 광장, 지평, 선율, 우창, 오로라, 고려해운, 장금상선 등 최고의 직장을 잡았습니다.
나는 싱가포르 등 외국의 전문 해상변호사와 경쟁할 수 있는 변호사 양성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내가 유학할 때 보았는데 싱가포르 국립대학엔 해상법 강좌가 연간 8과목이나 개설됩니다. 변호사시험에도 해상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해상변호사는 변호사가 됨과 동시에 바로 업무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우수한 변호사를 선발하여 2년 정도 도제식 훈련을 시켜가며 실무를 가르쳤던 우리와는 달라요.
지금도 해상사건은 영국계가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는데, 나는 로스쿨 시스템에서 교육을 잘 하면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보았고, 현재까지는 성공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려대 로스쿨에선 특성화과정과 별도로 10여개의 전문인증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해상법 과정도 가장 활발한 전문인증과정의 하나다. 해상법 전문인증을 받기 위해서는 해상법과 영어로 진행되는 해상운송법 강의를 반드시 들어야 하며, 이외에 국제거래, 상법총칙 · 상행위법, 보험법, 선박충돌법, 해상보험법 등에서 2과목을 선택과목으로 택해 들어야 한다. 이중 해상법, 해상운송법, 선박충돌법, 해상보험법 강의를 김 교수가 맡고 있다.
라자앤탄 등에서 해외 인턴
또 해상로펌이나 해운회사 등에서 2주간 인턴을 해야 하며, 학생들은 김 교수의 주선으로 싱가포르의 유명한 로펌인 라자앤탄(Rajah & Tann)과 알렌앤그레드힐(Allen & Gredhill), 홍콩의 리드스미스 리처드버틀러, 중국의 왕징, 일본의 오까베 야마구찌 등의 외국 로펌에서도 인턴십을 수행한다. 또 변호사시험이 끝난 후인 1월 말 고려대와 홍콩대가 홍콩에서 공동진행하는 해상법 심화과정을 이수해야 하며, 필수는 아니지만 여름 방학 때 선박에 승선하여 3박 4일간 승선실습을 하기도 한다. 지난 1월 22~26일 진행된 제5회 고려대-홍콩대 강좌에선 김 교수가 한진해운 파산에 관해 특강했다.
그 대신 고려대 해상법 전공자들에겐 1년에 6명씩 도선사협회와 선급협회, 해상법을 전공한 선배들이 주는 장학금이 수여된다. 또 해상 전문 로펌과 해운회사 등에 취업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해상법이 직접적인 변시 과목이 아닌데도 인기가 높다는 후문.
김 교수는 "고려대 해상법 전공은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졸업 후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고, 로펌 등의 기성 변호사들도 이런 사정을 알게 되어 시장에서 선호되고 있다"며 "로스쿨의 다른 분야도 실무와 연결시켜 고려대 해상법 분야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장 출신인 김 교수는 어떻게 해서 고려대 로스쿨의 해상법 교수가 되었을까. 이쯤에서 그가 마도로스의 꿈을 접고 해상법 교수가 된 사연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선장 출신의 해상법 교수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김 교수가 거의 유일하다. 그는 전액 국비장학생으로 운영되는 한국해양대를 나와 배를 타다가 다시 해상법을 공부해 법학석사,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된 주인공으로, 나중에 고려대 법대에 학사편입해 법학사 자격까지 갖췄다.
학사 둘, 석사학위도 둘
학사학위가 둘, 법학석사도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LLM을 해 두 곳에서 취득했는데, 중요한 포인트는 그가 현재의 로스쿨 시스템처럼 학부에서 법학이 아닌 항해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해 법학교수가 되었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학생들 얘기가 내가 강의를 쉽게 한다고 하는데, 항해학을 공부하고 선장 생활을 오래 해 현장에 대한 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가 태어난 곳은 경북 동해안의 작은 어항인 영덕의 축산항으로, 모래사장에서 불과 15미터 떨어진 곳에 고향집이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조부가 어선 3척을 가진 대형 어선 선주였던 김 교수에겐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배에 관련된 추억이 많다.
부모님 몰래 형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보기로 하고 선장에게 부탁해 어선을 탔던 그는 선원들의 지시로 선수의 작은 공간인, 폭슬(forecastle)의 갑판장 창고(boatswain store)에 들어가 있었다. 선수여서 배가 가장 많이 흔들리고 멀미가 심한 곳으로, 이때 멀미를 극복한 김 교수는 그 후로는 배를 타면서 한 번도 멀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 교수는 "선원들이 거기를 권한 것은 선주의 아들들을 골려주기 위함이었거나, 아니면 멀미를 없애기 위해 바다에서 내려오는 관행을 우리들에게 적용한 결과였을 것"이라며 "상선에서도 처음으로 선박에 승선하는 선원이 멀미를 심하게 하면 폭슬로 내어보내 단련을 시킨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의 바다와 배에 대한 추억에 이런 낭만과 유쾌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 1965년에 겪은 대경호 침몰사건이 그의 인생항로를 바꾼 첫 번째 사건이다. 김 교수 집에서 운항하던 대경호가 그해 12월 동해에서 많이 잡히는 가자미, 대게, 대하 등을 가득 싣고 축산항으로 들어왔다가 좌초하면서 집안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워지게 된 것. 김 교수가 서울이나 대구로 유학을 떠나 그 곳에서 중, 고교를 다니지 않고 고향의 영해중 · 고를 거쳐 일반대학이 아니라 학비 등이 전액 국비로 지원되는 한국해양대에 진학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대경호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김 교수는 그러나 《바다와 나》에서 "나는 내가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인연으로 선박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이 오히려 순리라고 생각한다"며 "나에게 오히려 기회를 제공하여 준 셈"이라고 적었다.
대경호 사건이 그를 한국해양대와 바다로 이끌었다면, 그의 나이 32세 때인 1991년 2월 호주 앞바다에서 좌초한 산코 하베스트호 사건은 김 교수가 선장에서 해상법 연구의 길로 들어서는 단초가 되었다.
산코기센에서 9년간 배 타
그는 한국해양대 졸업 후 당시 350척의 선박을 보유한 세계 최대의 해운회사였던 일본의 산코기센에 입사해 9년간 배를 탔다. 산코 시절 그는 산더미 같은 유조선부터 노르웨이 나르빅에서 대만 까오슝까지 45일간 항해한 철광석선, 원목선 등 다양한 선박을 경험했다. 산코 하베스트호는 그가 승선한 8번째 선박이었다.
미국 탐파에서 인광석을 싣고 호주로 향하던 중 2등 항해사가 해도를 개정하면서 암초를 빠트려 항로선정을 잘못하고, 선장인 김 교수가 이를 확인하지 못한 통에 배가 암초에 좌초되는 사고가 났다. 좌초사고는 선박전손사고로 이어졌다. 구조가 되지 않자 선박을 포기하고 탈출, 장래가 촉망되던 김 선장이 졸지에 난파선의 선장이 된 것이다. 배는 침몰했지만 다행히 선원들이 모두 무사히 생환하고, 호주 당국으로부터 어떠한 형사상, 행정상의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선장으로서 부끄러움과 책심(責心)을 느낀 그는 바다를 떠났고, 해운계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길로 해상법을 찾게 된 것이다.
호주 앞바다에 좌초
김 교수의 설명을 들어보자.
"화주가 호주 시드니 지방법원에 선주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해 선장인 제가 증인으로 나가게 됐어요. 법정에 나가는 것은 너무 싫었지만, 회사에서 김 선장이 나가지 않으면 해양대학교 학생들의 위상이 떨어지고 후배들의 진급에도 악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모교인 해양대의 명예가 훼손되는 것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나갔는데, 학교에서 배운 해상법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나의 경우에 어떻게 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어요. 주위의 선후배들에게 도움을 받고자 하였지만 아무도 나의 법률적인 고민을 풀어주지 못했죠. 반면 영국이나 호주의 선장들이 변호사와 함께 법정에서 또는 법정 밖에서 선장인 나에게 법률적인 조언을 해주었어요. 선장으로서 해상법을 전공하면 나와 같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고 좋겠다, 다른 분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배운 분야에서 한 번 더 기회를 갖자 그렇게 마음먹고, 고려대 대학원 법학과 준비를 시작한 것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바탕이 된 셈입니다."
제2외국어 공부해 대학원 합격
당시 대학원 시험엔 제2외국어가 있었다. 그는 집이 있었던 대전에서 학원을 다니며 불어까지 다시 공부한 끝에 고려대 대학원 법학석사과정에 합격했다. 1994년 3월 그는 평생의 은사가 된 채이식 교수의 연구실 조교를 자청했다. 아침 8시에 나가 연구실을 청소하고 본격적인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는 재미있었다고 한다. 교수들은 상법에서 말하는 선장이 학교에 공부하러 왔다고 좋아하며 이끌어주었고, 수업시간에 김 교수가 사고경험을 법률지식과 결부시켜 발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또 원래 문과 체질이었던 김 교수에게 법학이 더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공학사 학위가 수여되는 해양대 항해학과는 많은 과목이 이과 과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김 교수는 "해난사고를 경험하고 실무를 해보았기 때문에 필요성을 느껴 더 열심히 실감나게 공부를 한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석사논문을 작성할 무렵 그는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 법률사무소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해상법 실무가 발달한 김앤장에서 선장 경력에 법학석사를 겸비한 그와 함께 일하고 싶다며 제의를 해 온 것이다. 이때가 1995년 9월로, 그는 이때부터 1999년 3월 국립목포해양대 교수로 부임할 때까지 3년 6개월을 김앤장에서 해난사고 등에 대해 자문하며 프로페셔널 중의 한 명으로 활약했다.
"선장으로 불러주고 선장대우 해달라"
김앤장에 입사할 때의 이야기 하나. 김앤장에선 호칭을 해사실장으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김 교수가 "변호사님들도 변호사 면허를 가지고 변호사라고 하듯이, 나도 선장 면허를 가지고 있으니까 선장으로 불러주고 선장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당시 김앤장의 해상팀장 변호사는 "5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사람입니다. 해난사고를 당하여 해상법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왔습니다"라고 김 선장을 대표변호사에게 소개했다. 3년쯤 지나 영국의 한 법률잡지에서 한국 서울의 해상법 실무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시장을 지배하는 자는 김앤장의 팀장 변호사와 Captain I.H. Kim이라고 평가한 것을 보면 김 교수가 당시 김앤장에서 얼마나 활약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장 출신의 전문가로 로펌에서 근무한 것도 김 교수가 처음이다.
김앤장에서 근무하며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99년 2월 고려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국립목포해양대 교수가 되어 3월부터 강단에 섰다. 이어 로스쿨 도입을 앞두고 2007년 가을학기부터 부산대 법대 해상법 교수로 옮긴 그는 교수가 된 지 꼭 10년 만인 2009년 봄 로스쿨 개원과 함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부임했다. 그의 은사인 채이식 교수가 수제자로 인정해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한 결과로, 교수들 사회의 표현을 빌면 스승의 학문을 이어가는 적통이 된 것이다.
10년 만에 모교 교수로 부임
김 교수는 "석, 박사과정의 지도교수이셨고 고려대 법학과에 학사편입할 때도 도움을 주셨던 채이식 교수께서 당신의 후임으로 나를 추천한 것이 결정적 도움이 된 것"이라며 "당신은 이제 해상법 강의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시고 제자에게 자리를 열어주셨다"고 은사의 배려에 감사해했다.
대학에서 강의담당 과목은 아주 중요한데, 한 학기 6시간의 책임시수를 채우지 못하면 교수로서 자리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려대에서는 두 사람이 해상법 강의를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채 교수가 제자인 김 교수의 전공인 해상법 과목을 제자에게 양보하면서 길을 열어 주었다는 얘기다.
박사 하고 다시 학사학위
목포해양대에 있을 때 안식년 휴가를 이용해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LLM 학위를 받고 47세때인 2005년 고려대 법학과에 3학년으로 학사편입한 것도 김 교수의 그칠 줄 모르는 학구열이 돋보이는 대목으로, 그는 "오스틴에서 해상법을 연구하면서 더 큰 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법학 기초과목을 좀 더 다양하게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 지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3학번으로 학부를 마친 김 교수가 고려대 교수로 부임할 때 면접을 본 이기수 총장은 "박사를 하고 다시 학사를 한 사람은 고려대 역사상 김 교수가 처음일 것"이라고 덕담을 건넸다.
선장으로 외항선을 타다가 해상법 연구로 항로를 틀어 모교인 고려대의 법학교수가 된 김 교수는 특히 한국 해상법의 국제화를 위해 노력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우리 해상법의 국제화가 제 평생의 업"이라며 "적어도 우리나라의 해상사건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처리되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해운산업이 세계 10위권 안에 들어요. 조선산업은 1위이고요. 무역대국이 되려면 수출입화물을 실어 나르는 해운이 잘 되어야 하는데, 화물과 선박만 있다고 해운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법제도가 이를 뒷받침해주어야 해요."
그는 해상법의 인프라 확대를 주문했다. 아울러 해운과 조선업계의 계약 당사자들이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삼고 분쟁이 발생하면 한국에서의 소송과 중재를 통해 해결하도록 대대적인 캠페인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해상법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수요가 많아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선박회사와 우리 보험사 사이의 선박보험계약은 물론 적하보험도 영국법이 준거법으로 되어 있는 영문계약서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외국 회사와의 용선계약 등도 마찬가지에요. 이걸 빨리 국산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법이 무엇인지 영문화해서 외국에 자꾸 알려 계약을 체결할 때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삼게 하고 분쟁이 생기면 한국에서 해결하게 해야 해요."
"해사법원, 중재 유치하자"
김 교수는 2015년 12월 발족한 한국해사법정중재활성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해사법원을 설치하고 임의해사중재를 한국에 유치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서울에 본원, 부산과 광주에 지원을 설치하는 해사법원 설치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법사위에 계류 중이며, 선박충돌 등 해사분쟁을 서울에서 중재로 해결하는 서울해사중재협회도 2월 중 창립총회가 예정되어 있다.
물론 해사분쟁을 서울에서 중재로 해결하려면 계약 당사자들이 계약서의 분쟁해결조항에 이런 내용을 넣어 합의하거나 나중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 별도로 합의해야 해 한국 해상법 연구의 인프라 확충과 홍보가 필요하다는 게 김 교수의 지론이다. 그는 "서울해사중재협회가 발족되어 영국의 LMAA(영국해사중재인협회), 싱가포르해사중재(SCMA)처럼 서울에서 해사 관련 분쟁을 중재로 해결하게 되면 문제가 터져 런던 등을 찾아야 했던 한국 선사 등의 분쟁해결 리스크를 줄일 수 있고, 해운과 조선산업에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 교수는 외국의 법률저널 등에 1년에 3~4편씩 영어 논문을 기고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우리 해상법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을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같은 해상법 교수인 한국외대 로스쿨의 이균성 명예교수가 "해상법은 김인현 교수가 있었기에 세계화가 가능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김 교수는 2004년부터 미국의 유명한 해상법 저널인 'Journal of Maritime Law & Commerce'에 영문으로 논문을 작성해 발표하고 있으며, 세월호 사고와 한진해운 사태를 법적으로 분석한 김 교수의 영문 논문이 SSCI 저널인 홍콩로저널(Hong Kong Law Journal)엔 실리기도 했다. 그는 현재 SSCI논문 11편, SCOPUS 5편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2013년 네덜란드의 Kluwer사에서 초판이 출간되어 2017년 3판이 나온 영문 단행본 《Transport Law in South Korea》는 한국의 (해상)운송법을 처음으로 외국에 소개한 책자로, 김 교수는 이 책으로 2014년 봄 제7회 심당학술상을 받았다.
Kluwer사에서 한국운송법 출간
이와 함께 4년 전부터 한국 법원의 최신 해상법 판례를 평석해 우리말과 영어, 중국어, 일본어의 4개 국어로 제공하는 해상법 뉴스레터가 외국의 대학과 중재기관 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21호까지 나온 해상법 뉴스레터는 싱가포르해사중재 홈페이지에 게재되기도 했다.
한국 해상법의 국제화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해상법 교수로서 그가 소망하는 또 한 가지는 한국 해운산업과 조선산업의 중흥.
해상법 연구를 통해 해운과 조선산업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산학공동연구의 자세를 중시하는 그는 "해상법이 분쟁해결의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예측가능한 기능을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안유류오염사고나 세월호 사고, 한진해운 사태에서 보듯이 문제가 터지기 전에 선제적으로 제도를 만들어 예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는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의 오학론에서 학문하는 자세를 배웠어요. 마지막의 것이 독행(篤行)하라는 것인데, 독실하게 실행하라는 의미에요. 공부한 것을 현실사회에 적응하고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입니다."
한국해법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는 그가 국내외를 마다하지 않고 활발하게 세미나를 열어가며 해상법의 주요 이슈에 대한 지혜를 모으는 것도 이런 소신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지난해 가을엔 블라디보스톡으로 날아가 러시아 연방극동대에서 러시아 전문가들과 한국과 러시아의 해상운송법, 해상보험법을 비교 고찰하는 국제세미나를 주재했으며, 다음 달엔 중국 조선소들에게 일감을 빼앗기고 있는 여객선 건조에 관련된 금융이슈를 따져보는 '여객선과 선박금융' 세미나를 개최한다.
선장 면허 갱신 예정
선장 출신이자 지금도 유효한 선장 면허를 가지고 있는 '현역 선장' 김 교수의 이메일은 captainihkim으로 시작한다. 그는 선장 면허 유효기간이 오는 7월까지라며 그 전에 교육을 받고 면허를 갱신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김진원 기자(jwkim@leg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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