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법인을 설립해 법인 명의로 은행계좌를 개설했더라 은행 담당자의 심사가 불충분했다면 은행에 대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또 나왔다.
A는 성명 불상자들로부터 유령법인을 설립해 그 법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한 후 체크카드 등을 넘겨주면 대가를 지급하겠다는 제안을 받고 유령법인을 설립한 뒤 2022년 5월 광주 서구에 있는 은행에서 사업자 등록증, 인감증명서 등을 교부하고, 계좌 개설 신청을 하여 유령법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고, 통장, 체크카드 등의 접근매체를 발급받아 은행의 계좌 개설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는 유령법인 명의 계좌와 연결된 통장, 체크카드, 비밀번호 등을 성명 불상자에게 전달해 대여한 혐의(전자금융거래법 위반)로도 기소됐다.
1심과 항소심 재판부는 A의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했으나, A의 상고로 열린 상고심(2024도9324)에서 대법원 제1부(주심 신숙희 대법관)는 8월 29일 유령법인 명의 계좌 개설은 업무방해죄가 되지 않는다고 직권 판단,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되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먼저 "상대방으로부터 신청을 받아 일정한 자격요건 등을 갖춘 경우에 한하여 그에 대한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업무에 관해서는 신청서에 기재된 사유가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하여 자격요건 등을 심사 · 판단하는 것이므로, 업무담당자가 사실을 충분히 확인하지 아니한 채 신청인이 제출한 허위 신청사유나 허위 소명자료를 가볍게 믿고 수용하였다면 이는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서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대법원 2004. 3. 26. 선고 2003도7927 판결, 대법원 2008. 6. 26. 선고 2008도2537 판결 등 참조)"고 전제하고, "따라서 계좌개설 신청인이 접근매체를 양도할 의사로 금융기관에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하면서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금융거래의 목적이나 접근매체의 양도의사 유무 등에 관한 사실을 허위로 기재하였으나, 계좌개설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단순히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기재된 계좌개설 신청인의 허위 답변만을 그대로 믿고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의 요구 등 추가적인 확인조치 없이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 준 경우 그 계좌개설은 금융기관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이므로, 계좌개설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대법원 2023. 8. 31. 선고 2021도17151 판결 참조)"고 밝혔다.
이어 "피고인이 법인 명의 계좌를 개설하면서 작성한 계좌개설신청서는 내용의 진실성이 담보되는 서류라고 볼 수 없고, 제출된 관련 서류들도 법인 명의 계좌개설 시 기본적으로 구비하여야 할 서류들로 보일 뿐, 계좌 명의자인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거나 정상적으로 운영될 것이라는 등의 진실한 금융거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고, 이 부분과 관련하여 계좌개설 심사업무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기재된 금융거래 목적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추가로 그에 관한 객관적 자료의 제출을 요구하는 등 적절한 심사절차를 진행하였음에도 피고인이 그에 관하여 허위 서류를 작성하거나 문서를 위조하여 제출함으로써 업무담당자가 허위임을 발견하지 못하여 법인 명의의 계좌를 개설하기에 이르렀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지적하고, "결국 이 부분 법인 명의 계좌가 개설된 것은 피해 금융기관 업무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으로 볼 여지가 많아 계좌개설 신청인인 피고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으므로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원심 판결 이유와 기록에 따르면, 피고인은 법인 명의로 계좌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금융기관이 미리 마련한 양식인 예금거래신청서를 제출하고, 통장, 현금카드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경우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할 수 있고 전자금융거래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설명사항에 '설명들었음'이라고 표시하는 등 소극적인 행위만을 하였다. 또 피고인이 법인 명의의 계좌개설을 신청하면서 제출한 관련 서류들은, 계좌 명의자인 회사의 사업사실 등록을 증명하거나 회사가 상법 등 관련 법령에 따라 성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한 사업자등록증, 법인인감증명서, 법인등기사항전부증명서 등 뿐이었고, 이들 서류 외에 피해 금융기관의 업무담당자가 피고인에게 금융거래 목적 등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자료 제출을 요구하였다거나 이를 확인하였다는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리걸타임즈 김덕성 기자(dsconf@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