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⑧ 'No'라고 말할 수 있는 어소 변호사
[특별연재] 외국변호사의 기술⑧ 'No'라고 말할 수 있는 어소 변호사
  • 기사출고 2023.05.0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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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달군 Paul Hastings의 어소 변호사 '10대 업무원칙'

지난 4월 한 달 동안 미국의 변호사들 사이에서 링크드인(LinkedIn) 등 소셜 미디어를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었다. 미국 대형 로펌인 폴 헤이스팅스( Paul Hastings)의 어느 시니어 어소 변호사가 신참 주니어 어소 변호사들을 교육하기 위해 작성한 오리엔테이션 프레젠테이션용 파워포인트 슬라이드가 유출된 것이다.

'Non-negotiable Expectations'이라는 제목으로 로펌 어소 변호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10대 업무원칙을 소개하는 이 발표자료에 대해 소셜 미디어에서 열띤 찬반양론이 이어지면서 대형 로펌(Big Law) 어소 변호사들의 가혹한 업무환경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은정 외국변호사
◇은정 외국변호사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란 제목의 이 영문 발표자료의 내용을 국문으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조금 의역된 부분도 있다).

1. PH는 AmLaw 20대 로펌이다. 아무나 초일류 로펌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일류 로펌 변호사답게 일하라.

변호사는 특급호텔의 컨시어지

2. 변호사업은 서비스업이다. 변호사는 특급 호텔의 투숙객이 필요로 하는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컨시어지(concierge)이자 일류 레스토랑의 웨이터 역할을 해야 한다. 고객이 산을 움직여 달라고 하면 우리는 군소리 없이 산을 움직인다. 주니어 어소 변호사의 '고객'은 시니어 어소 변호사와 파트너 변호사이다.

3.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24/7) '온라인' 상태로 있어야 한다. 예외는 없다. 변명하지 말라.

4. 업무 일정 및 서비스 품질: 고객은 모든 업무의 완벽한 처리 및 업무 기한의 엄수를 요구한다.

5. 고객은 시간당 850 달러를 지급한다. 매사에 이를 염두에 두라. 모든 업무 결과물은 신속하고 프로페셔널하게 결점 없이 제공되어야 한다.

6. 모든 일에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단 하나의 서류에라도, 또는 일순간의 업무에라도 관여하면 거기에서 생기는 오류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당신 탓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7. 재택근무는 큰 혜택이다. 남용하지 말라. 집에 완전한 업무환경(듀얼 모니터, 도킹스테이션, 키보드/마우스, 전화기)을 갖추든가 사무실에 나오든가 하라. 인터넷 연결의 불안정을 탓하지 말라. 변명하지 말라. #3 및 #5 참조.

8. 직접 찾아보기 전에 질문하지 말라.(모르는 것은 구글 검색, 서식관리시스템(DMS) 조회, 법령 리서치, 지침 숙지 등을 통해 파악하라). 그래도 모르겠다면 로스쿨 동기에게 물어보라.

9.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6 및 #8 참조.

10. 이것은 당신 커리어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항상 최선을 다하라. 우리 로펌이나 소속 딜 팀이나 당신 자신을 위해 그래야 한다. 결국 로펌 변호사로 일하든 나중에 사내변호사로 일하든 다른 어떤 곳에서 일하든 평판이 커리어의 성공 여부를 좌우한다. 제대로 해야 한다.

'갑질' 여부 놓고 의견 갈려

어떤 사람들은 이 발표자료를 두고 '끔찍하다(horrifying), 모욕적이다(insulting), 정나미 떨어진다(disgusting)'라는 악평을 쏟아냈지만, 로펌 업계를 잘 아는 어떤 사람들은 어투가 좀 거칠기는 하지만 로펌의 생리를 솔직하고 정확하게 얘기한 거 아니냐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한국식으로 얘기하자면 대형 로펌이 소속 어소 변호사들을 대상으로 일삼는 '갑질'을 드러낸 사례이니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입장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런 걸 모르고 들어왔느냐'는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분위기다.

한국 로펌에서 26년째 외국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이 발표자료의 내용이 그다지 새롭거나 놀랍지 않다. 기업법무를 처리하는 어떤 로펌이든 신참 변호사들에게 요구하는 업무기준은 이 발표자료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투가 다소 거친 것은 별론으로 하고,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온라인 상태로 있으라는 3번 원칙 외에는 특별히 문제 삼을 것이 없어 보인다.

24시간 내 이메일로 연락 요구 

기업고객들이 로펌들에 요구하는 업무수준은 가혹할 정도로 높다. 구체적으로 요즘 외국 로펌들이 다국적 기업고객 소속 외국인 임직원의 한국 워킹비자 업무를 우리 사무실(법무법인 김장리)에 의뢰할 때 업무 단계별로 요구되는 최소한의 서비스 기준(service level standards)을 설정 · 관리하는데 이를 지키지 못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업무가 의뢰된 후 24시간 안에 해당 외국인에게 이메일로 연락해야 하는 의무가 부과되는 경우가 많다. 한 두 건도 아니고 매일 수십 개의 비자 건을 돌리면서 관리해야 한다면 이 의무사항이 꽤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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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로 M&A, 합작투자, 파이낸싱 등의 프로젝트성 업무에서 파생되는 법령 리서치, 의견서 작성, 계약서 검토, 거래종결 준비 등 각종 딜 업무를 들 수 있다. 어소 변호사들이 주로 담당하는 이런 업무는 급박하게 진행되어야 하는 딜의 특성상 빨리 처리되어야 해서 늘 여기저기서 재촉이 빗발친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아주 심한 것은 물론이다.

외국변호사든 한국변호사든 어소 변호사는 로펌의 이런 강도 높은 업무 환경을 조심해야 한다. 로펌 변호사 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높은 기대와 목표 아래 장기간 강도 높은 업무량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면서 심적으로 고갈되고 활력이 떨어지면서 신체적으로도 각종 성인병 및 면역력 저하와 관련된 여러 질환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일에 너무 몰두하는 과정에서 휴식과 운동, 취미생활 등을 등한시하면서 가족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쉽다.

어소 변호사들과 오랫동안 같이 일하다 보면 입사 초기에는 생기발랄하고 에너지가 넘치던 변호사들이 처음에는 로펌의 역동성과 새로운 기술 및 지식을 배운다는 설렘으로 일에 모든 것을 걸고 몰두하다가 점점 변해가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이들 중에는 강도 높은 업무를 여러 해 동안 계속하면서 점점 의욕을 잃고 과중한 업무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생각을 표출하면서 냉소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퇴사 통보를 하면서 다른 로펌으로 옮기거나 사내변호사로 이직하거나 개업하는 변호사들이 더러 있다.

과중한 업무에 퇴사 통보하고 이직

꽤 친하다고 생각했던 어소 변호사들이 그렇게 갑자기 퇴사하는 경우 서운한 마음에 왜 그만두느냐고 물으면 일이 너무 많아 힘들어서, 그리고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서 그렇게 결정했다고 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진작에 일을 배정하는 파트너들에게 얘기하지 그랬냐고 물으면 회사 분위기상 그래도 되는 건지 몰랐다고 하는 어소 변호사들도 있었다.

대형 로펌 소속의 한국변호사인 아내도 같은 문제를 경험했다. 약 10년 전 당시 어소변호사였던 아내는 출산 후 육아와 일을 병행하다가 자가면역 질환이 생겨 건강이 크게 나빠졌고 치료를 위해 2년간 휴직을 해야 했다. 몸에 병이 생기거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로펌의 고되고 혹독한 업무를 제대로 소화하기란 불가능하다. 지금은 다행히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지만 그때 어소변호사였던 아내가 처했던 어려운 상황을 애끓는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로펌의 직장문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021년 외국변호사의 커리어(#theforeignlawyerinkorea)에 대해 링크드인 포스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이런 개인적인 경험담을 배경으로 로펌의 가혹한 업무환경에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다. 그 포스트에서 진부하게 워라밸의 중요성이나 업무가 어느 한 사람에게 너무 몰리지 않도록 로펌이 갖춰야 하는 공정한 업무 배분 시스템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단지 어소변호사가 힘든 업무를 하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기본적인 사고의 틀이 필요함을 얘기했다. 고된 로펌 변호사의 생활이 자기 자신의 가족이나 행복, 건강을 갉아먹을 수 있으니 일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우선시해야 하고,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너무 많을 때에는 파트너에게 'No'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물론 'No'라고 말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그렇게 말해도 파트너가 계속 일을 맡길 수 있다. 그렇지만 평소에 'No'라고 말할 마음가짐이 있으면 정말 필요할 때 일을 거절하거나 조절할 수 있는, 잠재의식 속에 있는 자기보호본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된다.

로펌 변호사의 웰빙, 전 세계 공통 소재

그때 링크드인에 이런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은 내용의 진솔한 포스트를 올린 후 단 며칠 만에 세계 각국의 팔로워들로부터 1,300개가 넘는 '좋아요'가 달리는 것을 보면서 로펌 변호사의 웰빙(well-being) 문제가 전 세계의 변호사들 사이에서 보편타당한 소재임을 실감했다. (이 포스트는 아직까지 내가 링크드인에 쓴 글 중에서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것이기도 하다.)

Paul Hastings에서 유출된 10대 업무원칙 교육자료는 로펌의 각박한 업무환경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그런 업무환경 속에서 'No'라고 말할 수 있는 마음가짐 자체가 기술이다.

은정 외국변호사(법무법인 김장리, jun@kimchanglee.com)

◇은정 외국변호사는 누구=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변호사 중 한 명인 은정 외국변호사는 USC 로스쿨(JD)을 나와 1996년 캘리포니아주 변호사가 되었으며, 1998년부터 김장리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민 · 국적 업무에 탁월한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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