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에서 '창'으로 변질된 국제중재에서의 '적법절차 항변' 남용
'방패'에서 '창'으로 변질된 국제중재에서의 '적법절차 항변' 남용
  • 기사출고 2022.07.2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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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AC 중재법원장 Lucy Reed 서울 강연

지난 7월 20일 서울 광화문 크레센도 빌딩의 김앤장 법률사무소 세미나실.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중재법원장인 루시 리드(Lucy Reed) 교수가 "국제중재에서 적법절차의 남용(The (Ab)use of Due Process in International Arbitration)"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고, 토론 및 패널로는 최근 독립중재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 박은영 변호사와 대한상사중재원(KCAB) 사무총장을 역임한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임수현 변호사가 참여했다. 

박은영 · 임수현 변호사 패널 참여

이번 강연은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시리즈'의 하나로, 최근 서울을 방문한 루시 리드가 강연자로 나서 국재중재 관계자들 사이에 한층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루시 리드는 세계적인 여성 국제중재 변호사이자 중재인 중 한 명으로, 지난해 10월부터 SIAC 중재법원장을 맡고 있다. 그 이전엔 영국 로펌 프레쉬필즈(Freshfields)의 국제중재그룹 헤드로 활약하고, 싱가포르국립대의 국재법센터장과 실무교수로 재직했다. 뉴욕주 변호사인 그녀는 브라운대, 시카고 로스쿨(JD)을 나왔다.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중재법원장인 루시 리드 교수가 7월 20일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 중재법원장인 루시 리드 교수가 7월 20일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국제중재에서 적법절차의 남용"이란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이번 강연은 SIAC 강연 시리즈의 하나로, 'SIAC Lecture in Seoul'이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리드 교수는 강연 주제인 "국제중재에서 적법절차의 남용"이 최근 더욱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고 강연을 시작했다. 리드 교수는 먼저 국제중재 절차에서 변호사들이 중재판정부에 절차 진행과 관련한 요청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적법절차(due process) 침해'를 그 이유로 내세우는 경우가 증가하고 있는데, 그 내용과 빈도에 비추어 볼 때 '적법절차 항변의 남용' 수준에 이르는 현상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국제중재로 가는 사건들의 규모나 중요도가 높아지는 만큼 당사자들간 승부에 대한 치열한 다툼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대리인들이 중재판정부에 압력을 가할 전략적인 목적으로 비합리적인 '적법절차 침해'를 주장하는 사례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리드 교수는 "적법절차라는 원칙이 본래 당사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패'의 목적에서 벗어나 오늘날에는 '창'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며 "이로 인해 국제중재절차의 시간과 비용이 불필요하게 증가하게 되고, 적법절차의 근본적인 정신을 퇴색시켜 국제중재의 효능이나 가치를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리드 교수는 먼저 적법절차의 개념이 무엇이며, 이 개념이 국제중재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였다. 적법절차의 보장은 분쟁절차에서 당사자가 가지는 절차적 기본권이며, 해당 절차의 결론인 판결 또는 판정이 패소 당사자에 대하여도 종국적인 구속력을 갖기 때문에 중요한 기본적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적법절차의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분쟁절차와 관련한 적절한 통지의 수령, 자신의 사안에 대한 변론 기회의 부여, 공정하고 독립적인 판정부, 그리고 당사자들에 대한 동등한 대우 등이 있다.

리드 교수는 적법절차의 개념이 국제중재와 관련한 다양한 협약 및 규칙에 반영되어 왔는데 적법절차에 관한 문언의 차이와 변천에 주목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UNCITRAL) 국제상사중재 모델법과 중재규칙의 관련 규정의 개정 과정을 추적한 결과 다음의 세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첫째, 과거에는 '절차의 어느 단계에서든(at any stage of the proceedings)' 자신의 사안을 변론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하였으나, 이제는 '절차의 적절한 단계에서(at an appropriate stage)'로 바뀌었다. 둘째, 당사자들이 자신의 사안을 변론할 '충분한 기회(full opportunity)'가 주어져야 한다는 문언에서 '합리적 기회(reasonable opportunity)'로 용어가 바뀌었다. 셋째, 판정부는 절차 진행 시 공정성뿐만 아니라 효율성과 비용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추가되었다.

'순수한 절차'와 적법절차 구분해야

이러한 규정의 변천을 토대로 리드 교수는 이른바 '순수한 절차(pure process)'의 문제와 적법절차의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자로는 예컨대 당사자의 기한 연장 요청, 주장/청구의 뒤늦은 추가, 심리기일의 조정 등에 관한 판정부의 결정이 해당되며, 이는 적법절차와는 관련이 없고 여러 국내 법원에서 일관되게 중재판정의 취소사유 또는 집행거부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고 소개했다. 리드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중재에서 많은 경우 순수한 절차의 문제들이 적법절차 침해라는 이름 하에 제기되고 있어 절차의 지연 및 비용 증가를 초래하고 있고, 결정문 및 판정문이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문제점 등이 발생하고 있다"며 "이는 궁극적으로 국제중재 절차 자체에 대한 불신과 문제점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강연 중인 루시 리드 SIAC 중재법원장
◇강연 중인 루시 리드 SIAC 중재법원장

이에 리드 교수는 국제중재의 판정부들이 적법절차가 당사자들의 기본권에 관한 '방패'로 기능하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어느 당사자가 적법절차를 '창'으로 휘두르는 첫 시점부터 단호하게 이를 저지하고 순수한 절차의 문제와의 경계를 구분 짓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 세미나는 정부의 COVID-19에 대한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에 따라 대면 세미나 방식으로 진행되어 예상을 뛰어넘는 많은 국제중재 및 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하였고, 심도 있는 주제에 대해 열띤 질의응답이 이어지며 참석자들이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리걸타임즈 이은재 기자(eunjae@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