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열전⑤] '예술가와 법률가' 이중적 삶의 최고 경지 에테아 호프만
[법조열전⑤] '예술가와 법률가' 이중적 삶의 최고 경지 에테아 호프만
  • 기사출고 2022.04.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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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문학 넘나들면서도 법률가의 직분에 전념

자크 오펜바흐의 유명한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에테아 호프만(E. T. A. Hoffmann)이다. 호프만의 본명은 에른스트 테오도르 빌헬름 호프만(Ernst Theodor Wilhelm Hoffmann). 호프만은 그가 29살에 자신의 이름의 Wilhelm 대신에 14년 전에 사망한 모차르트를 흠모하여 Amadeus로 변경하였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에테아(E. T. A.) 호프만이 된 것이다.

호프만은 1776년 1월 24일 철학자 칸트의 고향인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현재의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부친 크리스토프 호프만(Christoph Ludwig Hoffmann)과 모친 알베르티나(Lovisa Albertina)와의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프로이센 궁정재판소의 변호사로 활동하던 부친은 비올라를 연주할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많았으나 알콜중독자에 속한다. 그의 모친은 신경과민의 히스테리가 있는 여성이었다. 그의 양친은 그가 2살 때 이혼하고 부친이 형을 데리고 다른 도시로 가출하여 호프만은 외롭고 정서적으로 결핍된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후견인은 법률가로 활동한 엄격한 독신남인 삼촌 되르퍼(Doerffer)였다. 호프만은 삼촌의 권유에 따라 6살 때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오르겐, 작곡에 관한 수업을 들었고, 그림과 도안 수업도 받았다. 외로운 호프만에게는 다행스럽게 평생 우정을 나누었으며, 대학에서 동문수학하고 사법시험을 거쳐 법률가와 정치인이 된 한 살 위의 친구 히펠(Theodor Gottlieb Hippel)이 있었다.

평생의 친구 히펠

호프만은 괴팍한 프로이센 법률가 집안의 가풍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결손가정에서 성장하였음에도 음악에 재능과 조예가 깊었다. 어린 시절부터 호프만은 자신의 세계를 둘러싼 상황을 익살, 조롱, 캐리커처로 풍자하기도 하였다.

◇E. T. A. Hoffmann의 자화상
◇E. T. A. Hoffmann의 자화상

호프만은 16살 때인 1792년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알베르티나의 법학부에 등록했다. 그가 법대에 진학하게 된 것은 법학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가 아니었고, 법률가 집안의 분위기상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법조인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법학 공부 이외에 부지런히 셰익스피어, 괴테 등의 방대한 양의 독서를 병행하였다. 비록 그가 음악과 그림 수업을 받았고 문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예술적 직업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호프만은 법과대학 시절 시험공부의 힘든 과정을 한 문장으로 편지에 남기고 있다. "공부는 느리고 슬프다. 억지로라도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그는 열심히 공부하여 법과대학 7학기를 마친 후 1795년에 치른 1차 국가시험인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어 3년간 수습생으로 근무하고 2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가 24살 되는 1800년에 판사시보시험인 최종 3차 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포센에 있는 남프로이센 정부의 법률관으로 발령되었다. 다른 프로이센 관리들과 달리 젊은 호프만은 비독일인 사교모임에 자주 나갔고, 탁자에서 즐기는 것을 즐겼다. 무도회와 야회에 즐겨 참석했고 예술가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밤늦게까지 폭주를 즐겨 '밤의 호프만', '도깨비 호프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호프만은 1802년 7월 26일 미샤(Mischa)와 결혼했다. 미샤는 그의 자유분방한 예술적 활동을 구속하지 않았고, 호프만이 법관의 직분에 충실하면서 전신마비의 중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구술을 받아적으며 소설 집필을 도와주는 등 충실하게 결혼생활을 20년간 이어나갔다.

나폴레옹 침공에 바르샤바 떠나

호프만은 1804년 바르샤바에서 정부 법률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년 후인 1806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가 프로이센에 진군하여 그해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게 되었고 신성로마제국인 독일은 패망하여 해체되었다. 당시 패망한 프로이센 공무원에게는 2가지 중의 하나의 가능성이 있었다. 나폴레옹에게 충성 맹세하면서 근무하는 것과 1주일 내에 바르샤바를 떠나는 것이었다. 호프만은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미련 없이 공직을 떠났다.

그는 특히 1807년부터 1808년까지 실직상태에서 매우 힘든 나날을 보냈고, 1808년부터 밤베르크,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를 전전하며 작곡가, 악장, 음악교사로서 음악평론과 소설 등 문학작품을 집필하며 예술가의 삶에 몰두하였다.

1814년 친구인 히펠의 도움으로 다시 법률가로 복직하게 된 호프만은 낮에는 법관으로, 밤에는 화가, 작곡가, 작가로 일하면서 열정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그는 베를린에서 낮에는 법관으로 일하고, 밤에는 와인 바에서 연극배우들과 저녁 식사와 술을 마시며 보냈다. 휴일에는 유명한 동시대인들과 서신교환을 하고 비판적인 논평을 썼으며, 다음날 법정에서 논의할 법률검토서를 작성하였다. 성실한 법률가의 길을 계속하면서 근무 외의 자유시간에 음악과 문학활동을 병행한 것이다. 법관과 고위직 행정관료에 해당하는 직책을 수행하며 낮에는 성실하고 공명정대하며 유능한 법률가로서 국가에 봉사하고, 밤에는 예술가로서 창작활동을 하고 단골 술집에서 폭음과 장광설을 즐기는 기인 같은 이중적 생활을 하였다. 법률가로서의 진면목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탁월하고 한 시대를 앞서간 법률가로 그 직분을 소홀히 하지 않고 내실 있는 활동과 함께 강직한 자세를 취하였다는 평가가 전해진다.

폴리매스형 천재

호프만은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과 문학을 넘나들며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는, 다재다능한 법률가이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폴리매스형 천재였다. 그는 업무상 과로와 스트레스, 알콜 중독 등으로 인한 전신마비로 1822년 6월 25일에 4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호프만은 예술가와 법률가의 이중적 삶의 최고경지에 올라 인류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 평가될 수 있다.

호프만은 1806년 나폴레옹의 진군으로 국가직 관료에서 해고된 후 베를린으로 옮겨 음악가로 활동할 기회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불발에 그쳐 한동안 빈궁한 나날을 보냈다. 2년 후인 1808년 밤베르크의 극단 악장이 되었는데, 취미로 하던 일이 그의 직업이 되었다. 지금도 밤베르크에는 호프만의 활동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그는 밤베르크의 가장 흥미로운 사람으로 주위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중심인물이었다. 1808년부터 1813년까지 밤베르크에서 극단의 악장, 음악교사 등을 하면서 음악비평을 작성했다. 1813~1814년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서 음악감독을 하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814년 10월 1일자로 호프만은 베를린 대심원에 복귀했다. 배우자인 미샤와 함께 방을 임차하여 지낼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호프만은 오페라와 징슈필(Singspiel)에 대한 음악평론가로 활동하였다. 그는 모차르트의 돈조반니를 오페라 중의 오페라로 극찬하고 모차르트를 흠모하였다.

호프만은 물의 요정을 주제로 한 '운디네'를 오페라로 작곡하여 1816년 8월 3일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생일날에 베를린 콘체르트 하우스(당시 왕립가극장)에서 초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호프만을 유명 작곡가로 만들었다.

그는 19세기 작곡가이면서 음악평론가였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법관이었고, 이러한 빵을 위한 직업은 그의 예술활동에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베토벤의 심포니 5번' 극찬

호프만은 1808년 9월 1일 밤베르크로 왔고, 그는 음악이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가져오는 끊임없는 그리움의 최고의 표현으로 파악하였다. 호프만은 베토벤의 심포니 5번을 낭만적 정신이 최고의 경지에서 표현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베토벤이 낭만적 정신으로 인간에게 전율, 공포, 놀람, 고통을 느끼게 하고 끝없는 그리움을 심원한 내면의 세계에서 도출하는 등 낭만적 정신을 천재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호프만의 삶과 예술은 슈만의 음악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슈만의 피아노곡 중에 '크라이슬레아나'(op. 16)는 호프만의 '칼로품의 환상교향곡'과 '수코양이 무어의 인생관'에 나오는 악장 크라이슬러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인다. 호프만은 슈만이 법대에 진학하는데도 영향을 미쳤다. 슈만의 어머니가 호프만도 법대를 나와 음악을 하는데 바로 음악을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아들에게 법학을 권유한 것이다. 슈만은 결국 법률가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에 몰두하였으나 정신분열증으로 고생하고 46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호프만이 같은 나이로 생을 마친 것과 유사하다.

오늘날까지도 크리스마스에 상연되는 러시아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 호두까기 인형은 호프만의 소설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이라는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또 호프만의 다른 소설이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작곡하는데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프만은 8년간 공직을 떠나 있는 동안 생계를 위해 음악교사와 악단 지휘자, 작곡가, 연극화가로서 바르샤바, 밤베르크, 드레스덴, 그리고 라이프치히를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호프만이 작곡한 방대한 양의 음악작품 중엔 기악작품보다 성악작품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프만은 1810년 '일반 음악신문'에 기고한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의 음악비평에서 음악은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예술이고 기악음악이 최상의 예술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시인법률가의 한 사람

호프만은 법과대학 시절인 1795년 셰익스피어의 여러 작품과 괴테의 마술피리 등의 작품을 탐독하였다. 그는 시인법률가(Dichter Jurist)의 한 사람으로 통한다. 사실 그의 활동의 핵심은 음악이고, 문학은 음악비평 등을 위한 것으로 기본적으로 소설의 소재가 음악과 관련되는 내용이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정신분열적인 현실과 꿈, 환상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호프만은 낭만주의 환상문학의 선구자로 유명하다. 현실과 환상, 삶과 예술, 법률가와 예술가 등 존재의 이중성은 호프만의 삶의 체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호프만은 1809년 처음으로 '기사 글룩'이라는 작품을 처음으로 발간한 이래 라이프치이에서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일반 음악신문'에 1809년에서 1814년까지 기고한 허구적인 내용인 '황금 단지'를 모은 '칼로풍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발표하여 선풍적 인기를 끌며 문학계 유명인사로 자리 잡았다. 이후 8년간 왕성한 집필활동을 이어가며 장편소설 '악마의 묘약'뿐만 아니라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 '스쿠데리 부인' 등을 수록한 소설집 '세라피온의 형제들'을 계속하여 발간하였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매년 수백 페이지의 문학작품을 써내며 '브람빌라 공주'와 호프만의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수코양이 무어의 인생관'을 발간하였다. '수코양이 무어의 인생관'은 일본 근대소설가인 나쓰메 소세끼(夏目漱石)의 1905년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호프만이 1808년에서 1813년까지 약 5년간 머문 밤베르크의 호프만극장 앞에 세워져 있는 호프만의 동상은 고양이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중병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전신이 마비된 채 풍자소설인 '벼룩대왕'을 부인과 비서에게 구술하여 집필을 마쳤고, 당국과의 마찰로 검열당한 일부 내용이 삭제된 채 그의 사후에 출간되었다. 그는 '벼룩대왕'에서 경찰국장 캄프츠(Kamptz)를 풍자한 내용으로 징계절차를 밟게 되어 다른 도시로 가게 되었다.

호프만이 작가활동을 하게 된 것은 실직한 상황에서 처음에는 음악에 몰두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경제적 재화 마련을 위한 호구지책으로 선택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밤베르크의 악장을 하다가 2달 만에 뜻이 맞지 않아 불화로 그만 두고 음악교습을 하면서 음악평론을 쓰고, 소설을 쓰기에 이르렀다.

호프만이 밤베르크에서 음악교습을 하던 중 자신의 제자인 어린 율리아 마크에게 느꼈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결별의 아픔이 환상적인 음악과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베를린 경찰국장과 대립관계

호프만은 자신의 이름처럼 성실한(Ernst) 자세로 대심원 참사관(판사)의 직에서 100페이지가 넘는 상세한 법률검토보고서를 매년 여러 건을 작성하면서 퇴근 후나 주말의 자유시간에 음악적 테마와 결부된 판타지를 주로 써나갔고, 특히 '스쿠데리 부인'은 심리적인 범죄 단편소설로 유명하다. 무엇보다 당시 베를린의 경찰국장이며 얀(Ludwig Jahn)의 선동사건의 처리와 관련하여 대척점에 섰던 정부위원회 위원인 캄프츠와 대립하여 호프만은 생전의 마지막 소설인 '벼룩대왕'에서 그를 크나르판티(Knarrpanti)로 빗대어 희화화하고 풍자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러한 풍자소설로 인해 징계절차가 진행되어 다른 지역의 재판소로 전근이 명해졌으나, 결국 이러한 부분도 중병과 더불어 그의 생을 재촉하여 그의 사망으로 징계사건은 종결되었다.

자유분방하고 거리낌이 없는 천재 호프만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가와 법률가의 이중적 존재를 병행하며 양자의 긴장관계를 극복했다.

호프만은 1814년 베를린에 있는 왕립 대심원 참사관(Kammergerichsrat)으로 복직했는데, 정부 고위직에 있던 그의 친구 히펠이 큰 역할을 하였다.

호프만은 고도의 반역 연결 및 기타 위험한 활동 조사를 위한 즉시조사위원회(Immediat Investigation Commission)의 무급 위원이 되었다. 동 위원회는 1819년 9월 16일의 내각 명령에 따라 시작되었으며, 독일 체조의 아버지인 얀 교수 사건은 '선동가에 대한 박해'라는 키워드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한 후 독일에선 독일연방(Deutscher Bund)을 결성하고 학생 운동단체인 부르센샤프트와의 연계하에 작은 제후 중심의 봉건국가를 종식하고 새로운 독일민족의 통일된 국가를 지향하는 정치적 분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얀이 대학생을 선동하여 국가의 전복을 하려고 하였는가 하는 것이 쟁점이었다.

호프만이 조사보고서 작성 책임자 당시는 사법권의 독립이 보장된 국가가 아니라 봉건국가로서 재판소가 왕실에 속해 있고, 국왕이 최종 판정하는 사법시스템이었다. 대심원 참사관은 왕이 판결을 내리도록 의견서를 작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얀은 1819년 7월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 경찰국장인 캄프츠는 얀이 처음부터 그는 독일국가들의 헌법을 뒤집고 독일 전체를 하나의 공화국으로 통합하려는 매우 반역적인 경향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얀은 1810년에 설립된 독일 연방이라는 비밀협회 창립자 중 한 명이었다. 얀은 반역죄로 기소되었고, 호프만이 즉시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서 보고서 작성의 책임자가 되었다.

호프만은 얀에 관한 조사보고서에서 "성장하는 청년들이 효율적으로 조국에 봉사하기로 일찍 결정했다면 매우 칭찬할 만하다"고 밝히며, 얀의 정치적 경향을 낮게 보았다. 경찰이 용인할 수 있는 만큼 어떠한 범죄 행위도 없었다고 밝혔다. 조사보고서는 마침내 "얀은 수사 중 그의 투옥을 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처벌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호프만은 당시 경찰국가로 회귀하려는 정치적 움직임에 전혀 굴하지 않고 자유가 억압된 암울한 시기에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견고히 지탱하려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21년 캄프츠는 즉시조사위원회보다 우월한 정부위원회의 설립으로 얀을 처벌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호프만이 던지는 교훈과 함의

첫째, 호프만은 어린 시절과 성장과정에서 불우한 환경을 탓하지 않았고, 방대한 독서와 배움의 길, 예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다. 그가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갖고 경지를 개척한 것은 그의 비범한 능력과 관련되며, 처음에는 배우고 좌충우돌하면서 경험하는 일련의 일들이 나중에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 시기에 생계의 수단이 되었다. 법률가로 활동하면서도 음악과 문학을 병행하였으나, 어쩌면 법률가의 직업은 자유롭게 예술가적 활동을 위한 경제적 토대처럼 보였다. 호프만은 법률가이면서 예술가라는 상반된 이중적 삶을 살았고, 현실과 환상의 이중적 존재가 그가 겪은 삶의 특징이다.

둘째, 나폴레옹이 침공하여 국가의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던 호프만의 자신의 진로에 대한 선택이 강요되었을 때 그는 애국자로서 프랑스에 대한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 충성하면서 법관의 직에 머물지 않았고, 힘든 예술가의 삶에 흔쾌히 도전하였다. 그리하여 출세가 보장된 공직을 벗어나 약 8년간에 걸쳐 자유인의 표상인 예술가의 길에서 고생이 되면서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문학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불우하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의 역경을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극복해냈고, 음악과 문학의 장르를 넘나들면서 낭만주의 예술을 대표하게 되었다. 다시 법조직에 복직한 후에는 특유의 문장력과 상상력으로 비범하면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는 대심원 참사관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두려움 없이 지적인 예리함과 심오한 법률지식으로 정의를 섬기는 데만 전념하는 불굴의 법률가로서 법치를 옹호했다.

셋째, 음악과 문학을 넘나들면서도 법률가의 직분에 전념하였다. 기본적으로 호프만은 법학자는 아니다. 법학의 이론에 천착하기 보다는 실무가의 전형이다. 그는 행정법률가 또는 법관이라고 할 수 있다. 호프만은 법조인의 삶에서 출발하면서 이중적 요구에 충실히 임하였다, 창의력이 향상되어 어느 하나도 부실한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법률직을 수행하고 이 과정에서 법률문제에서도 문학적 풍부함이 널리 알려졌고, 법률적 업무 속에서 이것을 문학으로 승화시키려고 하였다. 보통사람의 경우에는 하나의 직업에 성공하기도 힘들다. 음악가면 음악가, 소설가면 소설가, 법률가면 법률가를 천직으로 하는데, 호프만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직업적 활동을 하는 사람 못지않는 높은 경지에 오른 아주 이례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법률가를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문학과 음악의 경우에는 창조적인 예술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호프만이 선례가 없는 사건에 임하면서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창조적 문제해결을 시도한 것은 자신의 삶속에서 음악과 문학에 심취하면서 이중적 삶을 살아온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처럼 호프만은 법률가의 직분을 유지한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문학뿐 아니라, 음악, 미술 분야에서도 재능을 발휘하여 낭만주의의 '보편 예술' 정신을 구현한 독보적인 인물로 꼽힌다.

법률직무 활동에 성실한 태도

넷째, 호프만은 법률가로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법적인 논거를 제시하면서도 자기의 철학이 있고, 용기 있으며, 강단이 있는 실무가로서 원칙을 중시하였다. 그의 삶에서의 음악과 문학에의 경도현상이 중요한 사건에서 용기있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따라서 그가 법률에만 충실하지 않고 음악과 미술, 문학 등 다른 분야에 관심을 두었다는 것으로 그의 법률가적 탁월한 역량을 폄하할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그가 코믹한 작가의 재능을 갖고 있음에도 법률적인 직무활동의 문서에 성실한 태도를 보였다는 점이다.

다섯째, 어려움 속에서 형성된 소탈한 성격과 성실한 자세를 들 수 있다. 1806년부터 1808년까지 호프만은 극심한 빈곤 속에서 살았다. 한 살 위로 평생의 우정을 함께한 친구인 히펠은 훗날 프로이센 국무위원이자 서프로이센의 대통령을 지냈다. 히펠과의 우정은 평생 지속되었고, 호프만이 어려움이 있을 때 편지를 주고받으며 재정적으로 지원을 하기도 하고, 프로이센의 대심원 참사관으로 복직하는데 그를 적극 추천하기도 하였다.

호프만 사후 200주년

호프만은 프로이센 대심원의 참사관으로서 경찰국장 캄프츠에 맞서 자유주의와 법치주의를 강조하며 두려움없는 확고함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호프만에 대한 상급자의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명료한 표현과 예리한 재치로 그를 능가할 자가 없다", "훌륭한 작가가 법관의 직업에 적합하지 않다는 편견을 아마도 그보다 더 완벽하게 누구도 쉽게 깨지 못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는 다재다능한 천재로서 낭만시대 음악과 문학 그리고 미술 분야의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었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천직인 법률가로서도 성실하면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올해는 예술가의 삶을 병행한 법률가 호프만의 사후 200주년이 되는 의미 깊은 해이다.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kasan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