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한국법학계의 泰山北斗 고병국
[리걸타임즈 법조열전] 한국법학계의 泰山北斗 고병국
  • 기사출고 2022.02.0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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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국(高秉國) 박사는 1909년 1월 12일 평안북도 의주군 월화면 마룡동(현 평안북도 피현군 용흥리 마룡동)에서 부친 고승헌과 모친 백문선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호는 혜남(蕙南)과 운제(雲梯)이다. 혜(蕙)는 난초의 일종인 꽃을 말하므로 남쪽의 혜초라는 뜻이다. 그의 고결한 인품으로 읽힌다. 아울러 운제의 제(梯)는 사다리를 말한다. 구름 위로 향한 희망의 사다리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고병국 박사(이하 "雲梯"라고 한다)는 천품이 탁월하고, 5세부터 12세까지 한학자인 부친의 가정사숙에서 한학을 배우고 사서(四書)를 통독하였다. 신의주에서 초등과 중등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후 현해탄을 건너 1927년 일본의 지방 명문고인 시즈오카(靜岡)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고, 1930년 4월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법률학과(英法)에 입학하였다.

日 고문 사법과 합격

1932년 재학 중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11월 행정과에도 합격하였다. 고등문관시험의 합격자가 통상 진출하는 판검사나 조선총독부 관리로 나아가 출세의 가도를 달리지 않고, 그는 1934년 3월에 도쿄대를 졸업하여 법학사 자격을 취득한 후 도쿄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민법학을 전공하였다. 일제 때 총독부 관리가 되기를 권유받았으나 뜻하는 바가 있어 이를 거절하고 일본 도쿄에서 후꾸다 스미오 변호사와 동업으로 변호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고병국 박사
◇고병국 박사

한편 조선총독부관보 제2924호(昭和 11년 10월 10일)에 의하면, 주소지를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인하동 214번지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변호사 등록신청을 하여 1936년 10월 7일자에 변호사 명부에 등록한 사실이 있다. 雲梯는 입신출세(立身出世)의 길인가, 우국지사(憂國之士)의 길인가의 갈림길에서 대학교수와 변호사를 병행하는 중도적 삶의 경로를 밟았다. 雲梯는 1938년 9월부터 1941년 4월까지 연희전문학교에 교수로 채용되어 민법 등을 강의하며 후진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초대 서울대 법대 학장

雲梯가 38세가 되던 1945년 10월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일제 말기 폐교되었던 학교를 복교하였다. 1946년 8월 경성대학과 통합하여 국립 서울대학교가 설립되자 초대 법과대학장에 취임하여 초창기 국립대학의 기초를 형성하는데 그 공적이 크다.

雲梯는 1948년 정부수립에 직면하여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와 국회법 및 국회규칙법안 기초위원회 양 분과위원회 전문위원으로 유진오 박사 등과 함께 참여하여 헌법과 법률의 기본적 틀을 확립하였다. 또한 1948년 8월 17일 국회사무처 속기록(제42호)에 의하면, 雲梯는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의 국회 발의 당시 전문위원으로 세밀한 내용에 관한 토론을 하고 있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민법총칙 기초

아울러 雲梯는 1948년 정부수립 직후에 설치된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민법총칙을 기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56년 서울대 법과대학 학장 겸 교수로 있으면서 22명의 민사법 교수가 참여하는 민사법연구회를 결성하여 이희봉 교수와 공동대표로 활동하면서 민사법의견서를 작성하여 국회에 입법자료로 제공하는 등 현행 민법 제정에 기여하였다. 雲梯는 한국 민법학의 최고의 권위자로 평가되어 1963년 경북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雲梯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즈음하여 입법의 토대 구축이 절실한 상황에서 그 기초를 위한 주춧돌을 놓는데 기여하였다. 1954년 이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법학원의 초대 부원장, 한국공업소유권법학회(현 한국지식재산학회) 초대 회장 및 한국법학교수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국법학의 향상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고 1976년 5월 7일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雲梯는 평생을 근면 성실과 검소하면서 청빈한 생활이 몸에 밴 선비형 학자였다. 소주를 좋아한 애주가를 넘어 호주가이면서 값비싼 술보다는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에서 담소 나누는 것을 좋아한 청빈한 학자였다. 체구는 비록 왜소하지만 성품은 조용하고 차분하여 별명은 '홍안의 미소년'이었다. 서울법대 초기의 제자들의 눈에는 인자하고 겸손을 갖춘 강인한 성품으로, 무엇보다 원칙을 중시하는 강단이 있는 학자였다.

雲梯가 법대생에게 강조하는 라틴어가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이었다. 6.25 전란 속에서도 부산의 법대 가교사의 정문에 이 문구를 내걸고, 동숭동 법대 본관이나 정의의 종에 이를 새겨 넣은 것도 雲梯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雲梯는 융통성이 없는 천하의 고집불통으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법대 출신이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여 맡은 직분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며 꿋꿋이 사회를 지탱한 것은 雲梯와 같은 참다운 교육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雲梯는 주위의 어려운 사람에게는 따뜻한 잔정이 있고 박애정신을 갖고 있는 인자한 성품의 학자라고 할 것이다.

雲梯는 1948년 5월 8일 서울법대 초대학장을 그만두고 서울시 남대문로 10번지에서 변호사 개업광고를 독립신보에 내면서 변호사 · 법학사로 명기했다. 6.25 동란 중 1952년 부산에서 학생과 교수 등이 다시 교수로 복직하기를 간청하여 그는 다시 서울법대 교수가 되었다. 1952년부터 1957년까지 재임한 서울법대 학장직을 내려놓고, 1958년 4월부터 2년 5개월 정도 단국대학 학장으로 활동하다 1960년 9월부터 변호사 활동을 겸하면서 경희대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였다. 雲梯는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대학의 강의를 병행하였다.

雲梯는 1960년 6월 18일 자유당 일당 독재 저지를 취지로 자유법조단의 발기인 20인의 한사람으로 이를 결성하는데 관여한다. 당시 자유법조단의 대표는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맡았고, 雲梯는 9인의 운영위원 중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대법관 출마 5 · 16으로 무산

4.19 혁명으로 촉발된 정치 지형은 변호사단체가 새로운 정치적 대안세력으로 등장하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대법관의 선거제를 도입하는 제도적 결실을 이루어냈다.

雲梯는 1961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대법관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5월 18일 시행 이틀을 앞두고 무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雲梯는 1969년 1월 서울시 남대문로에서 다시 변호사 사무실을 열었다. 雲梯는 1969년 1월 25일 수도변호사회 창립총회에서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雲梯는 1969년 4월 25일 대법원 산하의 사법제도 개선심의회의 11인의 위원 중 대법원판사, 국회의원 등과 함께 동 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雲梯는 1971년에는 대한변호사협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제국대학 출신의 이례적 행보

오늘날 대학에서 교수는 지식의 상품전달자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로스쿨의 경우를 보면 연구에 치중하는 이론적 교원과 강의에 치중하는 법학교육자로 양분된다. 학생의 입장에서 보면 후자를 선호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는 연구 역량도 중요하지만 후학의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법학교육자도 중요하다. 두 분야에서 모두 역량을 발휘하는 출중한 사람도 있으나, 雲梯는 연구자로서보다는 법학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최고의 제국대학 출신에 고등문관 양과를 재학 중 패스하였으면 입신출세의 문이 활짝 열렸을 텐데 雲梯가 교육에 헌신하려고 한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인 행보에 속하는 것이었다.

교육 · 행정에 치중한 법학교육자

雲梯는 법학연구자이기도 하지만 법학의 기초를 충실히 전수한 법학교육자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雲梯는 이론과 실무를 함께 겸비하였으나, 논문보다 교육과 행정에 치중한 측면이 있다.

하버드 법대학장을 20년간 재직한 로스코 파운드(Roscoe Pound)의 저서인 『법률사관』(1953, 법문사)을 단독으로 번역하였고, 『법의 새로운 길』(1961, 법문사)은 이범찬과 공역하였다. 雲梯는 로스코 파운드에 깊이 매료되어 대륙법 일변도에서 영미법에 관심을 촉발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의 연구실적 중 "계약의 자유와 제한(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편 13집, 1974)"이라는 논문이 있으나, "실용주의 법률사조"(서울대 대학신문 1953. 5. 2)는 대학신문에 기고한 것으로 논문의 격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雲梯는 1961년 9월에 경희대 제2대 총장으로 취임하여 1963년 5월에 퇴임하고 1968년까지 경희대 대학원장을 맡았다. 경희대 총장 시절에 쓴 "내가 바라는 사법제도"는 오히려 깊이 있는 논문에 속한다. 그밖에 서울대 법대학보 창간호, 제2권 제1호 및 제3권 제1호, 단국대 법학논총 창간호와 제2호, 경희법학 제4호(1961)의 권두언과 경희대 총장 졸업식 훈사(1962, 1963 대학주보)를 보면 그의 학문과 사상 및 법철학의 기초가 단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雲梯는 유진오와 공편 형식으로 학자와 실무가의 다수가 참여하여 완성한 『법률학사전』(1954, 청구문화사)을 발간하였다. 또한 엄민영 교수와 공편저 형식으로 『법학』(1958, 범조사)을 14인의 저명한 학자들과 함께 집필하면서 민법의 장을 안이준, 김주수와 공동으로 집필하였다. 김병관 변호사와 공동 편집자로 발간한 『영미법 사전』(1958, 백영사)이 있고, 전원배 교수와 공저 형식으로 『법학개론』(1961, 박영사)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雲梯는 해방 직후 변호사시험, 제13회 고시행정과, 제15회 고시 사법과 시험의 출제위원으로 활동하고, 1967년 제7회 사법시험의 출제위원으로 참여한 박일경, 유기천, 정희철, 최대교, 이영섭 등과 함께 채점소감을 밝히기도 하였다(사법행정 제8권 제5호).

雲梯는 서울대학교 초대 법과대학장의 직을 맡게 되었다. 당시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좌익 계통의 교수들의 선동과 학생들의 수업거부 등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雲梯는 흔들리지 않는 자유주의의 확고한 신념에 따라 수업을 지속하여 혼란기 법과대학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雲梯는 1961년 9월에 경희대 제2대 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가 서울법대 학장 시절 서울법대 제자인 조영식 경희대 총장의 후임으로 취임하고 조 총장은 이사장으로 취임하는 사제지간의 미담사례라고 할 것이다. 동아일보 1961년 9월 28일자는 제2면 상단에 새 얼굴을 소개하며 "차분한 법학계의 원로, 교육내용을 갖추는 것이 임무"라고 타이틀을 뽑고 있다. 아울러 그의 취미로 테니스와 서예를 들고 있다.

제자 조영식 총장은 이사장 취임

雲梯는 1958년 단국대학장 시절에 이종흡 교수의 회갑기념호에 "만수무강, 웅지대성(萬壽無疆, 雄志大成)"이라는 초서로 축서(祝書)를 남겼는데, 그 뜻도 의미가 있고, 서체도 수려하고 힘이 있어 그의 서예 실력이 취미의 수준을 넘어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축서의 말미에 그의 아호 운제(雲梯)와 이름 고병국을 한자로 쓰고 있다.

1969년 1월 한국법학교수회장인 雲梯의 화갑을 기념하여 당시 경희대 조영식 총장의 후원하에 경희대가 발행하고 한국법학교수회가 편집한 혜남(蕙南) 고병국 박사 환력기념논문집 "법학의 제문제"를 발간하였다. 이 기념논문집은 독일의 Festschrift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것으로, 민법학에 한정하지 아니하고 다양한 분야의 23명의 저명한 학자의 논문을 실어 발간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에 속한다. 이것은 우리 법학계의 최초의 단행본 형식의 화갑기념논문집이라고 할 것이다. 이 기념논문집의 하서(賀序)는 설송(雪松) 정광현 교수가 작성하였다.

雲梯 별세 후 10주년이 된 시점인 1986년에 경희대 법대 제자인 홍천룡 경남대 법대학장이 법률사관의 개정판을 스승의 이름으로 냈을 때 위 기념논문집의 편집위원장을 맡았던 서돈각 교수가 "再版 출간에 붙여"라는 서문을 쓰고, 신문에도 서평을 썼다.

진리애 정신 강조

우선 雲梯의 법사상과 관련하여 권력에 추종하기보다는 양식 있고 소신있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권력을 억제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정신이 돋보이는 자유주의 사상가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특히 국립 서울대 설치법 파동의 한가운데에서 중심축을 잃지 않고 소임을 다하여 국립 서울대 설치법령을 수호하는 등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라고 할 것이다.

雲梯는 학문의 영역에서는 진리애가 중요하고, 학문이 단지 지식의 체계화된 것을 보존하고 전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던 시절도 있지만, 이것이 학문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물건이요, 상품화된 지식의 생산과 소비의 관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고 여기서 나오는 것은 진리도 아닐 것이고 기존지식의 보전에 그쳐서는 진정한 학문이 아니라고 설파하였다. 학문의 본질이 진리탐구의 정신에 있는 이상 이 정신의 본질인 자유가 절대로 억압됨 없이 그 활동이 충분히 발휘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천만인이라 할지라도 나는 간다"는 진리애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단국대 법학논총 제2호, 권두언 1959). "도의와 진리의 세계는 거기에 선견(先見)하려는 의욕과 용기와 예지를 가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경희대 졸업식 총장 훈사(1963)도 깊은 울림이 있다.

제헌헌법 기초위원 참여

雲梯는 제헌헌법의 기초위원으로 참여한 이래 선거제도, 사법권의 독립 및 헌법위원회 제도 등에 관심을 표명하고 대중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등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법학도가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雲梯는 1958년 단국대 법학논총 창간호의 권두언에서 "법학도는 그 목적에 합치하여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현행의 법을 비판하고 이상의 법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비판적 태도를 가지고 정의에 반하는 법의 제정과 법의 개악에 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비판적 지성을 강조했다.

법률만능주의 배격

무엇보다도 雲梯는 법률만능주의와 개념법학을 경계하면서 법학을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법학의 깊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는 전제하에 법률만능주의의 형식주의를 배격하였다.

경희법학 제4집의 발간에 즈음하여 雲梯는 "개념법학적인 사고방식을 속히 지양해야 할 것으로 본다"고 하면서, "법을 그의 내재적 가치로부터 분리시켜 형식적인 논리적 전개를 기도한 개념법학에는 가담할 수 없다"고 하면서 "법이란 당위로서 규범법칙을 의미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현실적 사회적 뒷받침을 가짐으로써 그 의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이란 단순한 이상이나 현실이 아니라 이상인 동시에 현실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논리에 근거하는 것 같다"고 밝히고 있다. 경희대 졸업식 총장 훈사(1963)에서는 "이상은 단순한 몽상도 아니요 추상적인 관념도 아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반드시 현실의 힘이 되어 작정(作定)되는 것이다"라고 역설하고 있다.

雲梯는 1955년 서울대 법대학보 제2권 제1호의 권두언에서 법학은 깊은 학문으로 법학 이외의 관련 분야에 대한 풍부한 식견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법학은 더 넓고 깊은 기초, 사회생활에 관한 인간체험이 필요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필요한 깊은 학문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법사상은 오늘의 로스쿨 제도의 설립이념에 투영되어 있다.

육법전서만 가지고 1백 분 강의

그의 법대 제자인 당시 성균관대 이범찬 교수가 雲梯 서거 1주기를 맞이하여 중앙일보 1977년 5월 6일자에 기고한 "귀에 선한 명강···지금도 옆에 계신 듯"이라는 타이틀의 추모글에서 "학장으로 계시면서 민법총칙을 강의하실 때다. 육법전서만을 들고 들어오신 후 1백 분을 거침없이 밀고 나가시던 선생님의 명강은 놀랍고 신기롭기만 했다. <중략> 다정하고 인자하신 혜남 선생님의 성품과 고매한 인격, 학문에 대한 정열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모든 후학들의 영원한 사표가 될 것이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雲梯는 동아일보 1973년 2월 2일자 6면 "두고 온 산하, 북을 그리는 망향 3대, 못가는 고향"이라는 특집기사에 신의주 태생 할아버지와 서울 출생의 딸, 초등학생 외손자와의 대화를 엮고 있다. 雲梯의 고향은 일제 강점기 경의선의 종착점인 신의주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곳은 만주나 중국의 북경, 천진, 상해 등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국경지대의 길목이다. 雲梯는 실향민이자 유민(流民)으로 강물이 언 압록강에서 썰매탔던 기억을 되살리며, 그의 딸은 아버지를 모시고 아들과 함께 그 강물을 굽어봤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고 있다.

한국 법학계의 가교 역할 수행

그는 아쉽게도 살아 생전에 자신의 고향인 압록강가 신의주을 방문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아호처럼 평생을 소탈하면서 난초와 같은 향기 있는 삶을 살았고, 도의와 진리에 입각한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희망의 사다리를 놓았다. 雲梯는 변호사와 대학교수 그리고 교육행정가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고매한 인품과 해박한 지식 그리고 실천적 역량을 통해 한국법학계의 향상을 위한 가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고병국 박사를 한국법학계의 태산북두(泰山北斗)라고 부를 수 있다.

김용섭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kasan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