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

[이행규 변호사]

2008-04-16     김진원
바야흐로 주총시즌이다.

경영자들에게 회사 경영을 맡겨 놓은 주주들이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일상적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할 수 없는 소액주주들의 경우에는 회사 경영진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다.

한편, 1인 1펀드 시대을 맞이하여 주식이 아닌 펀드에 투자한 소액투자자들도 이러한 주주총회의 결의에 간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즉,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들이 펀드가입자들로부터 위임을 받아 펀드에 편입한 주식의 의결권을 직접 행사하게 되고 펀드가입자들은 이러한 의결권 행사에 따른 경제적 결과물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

기관투자자의 하나인 자산운용사들은 과거에는 대체로 현 경영진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해 왔다. 그런데 작년부터 자체적인 의결권 행사 지침을 제정하여 투자대상기업(Portfolio Company)의 가치 극대화에 반하는(펀드가입자의 이익에 반하는) 현 경영진의 의안 제안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방향으로 의결권을 행사하여 자산운용사들의 전통적인 역할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자산운용사들이 펀드가입자들에 대한 선관주의의무(Fiduciary Duty)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당연히 필요한 것으로서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듯 최근 자산운용협회에서는 자산운용사들이 일응의 기준으로 참고할 수 있는 의결권 행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미국의 경우 이러한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대리)행사 관련 자문(Proxy Research and Recommendation Services)이 사적 시장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앞으로 국내 관련 산업의 출현 및 건전한 성장에 참고가 될까 해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의 의결권 (대리)행사 관련 자문 산업은 1980년대 초반에 펀드나 연기금 운용사들이 투자대상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와 관련하여 투자자 또는 출연자에 대한 선관주의의무를 보다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외부의 전문적 도움을 얻어야 할 필요성(규제당국의 요청 등)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우리에게도 SK(소버린)나 KT&G(칼아이칸) 분쟁 과정에서 익숙해진 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 Inc.(ISS)가 1985년에 설립되었는데, 1990년대와 2000년도 초반의 Enron 과 WorldCom 사태를 겪으면서 기관투자자들의 선관주의의무 이행이 더욱 강하게 요구되고 주주행동주의(Shareholder Activism)가 활성화되면서 관련 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ISS는 현재 1억 5천만불 정도의 시장(일부 전문가들은 수년 내에 5억불 규모로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음)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사실상 시장을 독점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들어 몇몇 후발업체가 설립되었지만 20여년 이상의 경험과 평판을 가지고 있는 ISS의 아성이 쉽게 무너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해 8월 몇몇 미의회 의원들의 요청에 따라 2006년 9월부터 2007년 6월까지 이루어진 미 의회 정부책임처(United States 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 GAO)의 ISS를 비롯한 의결권 (대리)행사 관련 자문업체의 업무 수행의 위법성 여부 및 미 연방 증권위원회(Securities Exchange Commission)의 이들 업체들에 대한 적정한 감독 여부에 대한 조사보고서(아래 첨부 파일 참조)가 발간되었다는 것이다.

GAO 조사의 핵심은 의결권 (대리)행사 관련 자문업체가 제공하는 업무가 이해의 충돌(Conflict of Interest) 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시장의 진입장벽(Barrier to Competition)이 높아 독점의 폐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전자의 경우 (i) ISS를 비롯한 몇몇 자문업체가 주주인 기관투자자들에게 proxy 관련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도 투자대상기업에게 기업지배구조 개선 관련 컨설팅 서비스를 동시에 제공하고 있는 것과, (ii) 자문업체의 오너나 임원이 투자대상기업의 주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과, (iii) 자문업체의 고객인 기관투자자가 의결권 (대리)행사 권고의 대상인 주주제안을 할 수 있다는 점과, (iv) 자문업체가 투자대상기업에게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에게 소유되어 있다는 점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이루어졌다(실제로 다양한 금융리스크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RiskMetrics Group이 2007년 1월 ISS를 전격 인수하였음). 이 조사는 사실상 ISS를 주타깃으로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GAO는 ISS가 이해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방화벽(Firewall)을 구축하는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고 이를 고객인 기관투자자들이 만족스러워 하고 있으며, 기관투자자들이 ISS의 권고를 의결권 행사를 위해 고려하는 다양한 요소 중의 하나로 취급함에 그치고 있다는 이유로 심각한 위법 사실이 존재하지 않고, ISS의 시장 지배력이 잠재적인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후발업체들의 시장 진입을 완전히 봉쇄하고 있지는 않아 위법하지 않다고 각각 결론내렸다.

이에 대해 GAO의 조사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진행되었고 ISS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지만, ISS는 그간의 논란을 종식시키고 GAO 보고서를 면죄부로 활용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업무를 개척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경우 이러한 의결권 (대리)행사 관련 자문 시장이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고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자산운용협회가 최근 가이드라인을 권고한 정도의 수준에 머물러 있어 이러한 자문시장의 문제점을 논의하기에는 시기상조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비대해져 가고 있는 펀드시장과 곧 시장이 형성될 퇴직연금 등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행사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더해질 것이다.

특히 수십, 수백개의 투자대상기업으로부터 제안되는 수백, 수천개의 의안에 대해 펀드가입자와 연기금출연자의 이익에 부합하도록 적정하게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기관투자자들의 의결권 (대리)행사 관련 자문을 제공하는 업체의 출현이 요구되고 있고, 이는 펀드가입자와 연기금출연자의 이익은 물론 건전한 자본시장의 육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앞서 살펴 본 미국의 사례가 시사하는 이해의 충돌과 독과점의 폐해를 꼼꼼히 따져 볼 필요가 있겠다.

이행규 변호사(hglee@horizonlaw.com)

◇이행규 변호사는 법무법인 지평 소속으로, 현재 미국 뉴욕소재 White & Case에서 국제변호사로 근무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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