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만 전 대법원장을 기리며

[홍일표 변호사]

2008-04-02     김진원
미국이나 유럽 여러나라의 법조계를 볼 때마다 부러움이 드는 것은 법조인에 관한 전기가 많이 나와 폭넓게 읽히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적인 사법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지난 우리 법조계에도 사법부의 독립과 법치주의의 발전을 위해 애쓴 훌륭한 선배 법조인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의 법조인으로서의 삶과 생각을 본격적으로 추적한 전기가 몇 되지 않아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이런 때에 리걸타임즈가 조진만 전 대법원장에 관한 연재기사를 게재해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았던 법조인의 한 사람으로서 여간 반갑지 않았다.

필자가 조 전 대법원장을 처음 뵌 것은 1969년 4월에 있었던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현 사법연수원의 전신에 해당함)에서의 특강시간이었다.

조 전 대법원장이 이미 대법원을 떠난 지 수개월 되던 때로 기억된다. 특강에서 대법원장께선 필자를 비롯한 사법대학원 13기 대학원생들에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자만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학교 공부는 자신이 노력한 만큼 지식의 습득이란 결과가 얻어지게 마련이지만, 학교를 떠나 사회에 나와 보면 세상일이란 자신이 노력한 만큼 그에 상응한 성과를 얻기가 어려워서 공부와는 비교할 정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법관은 모름지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하고, 법관의 길은 수도승의 그것과도 비슷한 것이라고 하셨다. 사법도 중요하지만 올바른 법, 모순되지 않는 법을 만들어 내야하는 입법이야말로 더욱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라는 말씀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강시간에 뵌 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두 번 더 조 전 대법원장을 찾아 뵐 기회가 있었다. 석사학위논문을 드리려고 찾아 뵈었을 때에는 해외유학을 권하시면서 하루 빨리 젊었을 때 선진문물을 배우라고 하셨다.

그 후 필자가 1974년에 판사로 임명되어 법원에서 근무하면서, 대법원장께서 판결문 작성의 간이화 추진, 재판연구관제도의 도입 등 법원 업무의 발전으로 이어진 여러 업적을 남기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조 전 대법원장을 모셨던 선배 법관이나 직원들로부터 그 분의 청빈한 생활태도와 법관으로서의 강직한 자세에 관해서 여러차례 얘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한글사랑도 남달랐다. 1966년 서울 서소문의 법원 청사의 초석에다 한글로 ‘큰 터에 머리를 놓았다. 길이 맑고 바르라’는 글을 남긴 것은 유명한 얘기이다.

3남인 조 윤 변호사에 의하면, 조 전 대법원장은 조선어학회와 가까웠고, 한글애호가인 김선기 박사와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김선기 박사는 명지대에서 언어학 교수를 지냈다.

재판연구관제도가 없었던 당시에는 대법원판사가 어려운 법률문제에 관해서 조 전 대법원장의 법률적 견해를 참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성수 전 대법원판사는 그의 저서인 ‘법창에서의 사색’ 머리말에서 ‘가지가지 사건들을 다루는 가운데 대법원장 조진만 선생의 고원(高遠)한 이론에 따랐다’고 적고 있다. 또 방순원 전 대법원판사는 당시 법조에 있어서의 조 전 대법원장을 달에 비유하면서 그것도 보름달과 같은 존재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다. 서초동 법원 앞을 지날 때마다 평생을 소신과 청렴으로 살다간 조 전 대법원장님이 더욱 생각난다.

홍일표 변호사(전 사법연수원장, ihlpyo@kimchangle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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