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칼럼] 내부신고와 고충처리 메커니즘의 진화
"내부신고는 제재에, 고충처리는 구제에 방점"
ESG 평가기관으로부터 높은 등급을 받은 회사를 자문한 적이 있다. 그 회사는 그룹사 차원에서 익명성이 보장되는 내부신고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관련 규정을 만들고 전자적 방법으로 접수된 신고 사건을 체계적으로 조사하는 절차도 갖추었다. 그런데 지방에 위치한 그 회사의 생산공장에 방문하여 현장 직원에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경우 어떻게 신고하시나요?"라고 묻자, 직원은 "신고 절차가 있는지 잘 모르겠고 관리자에게 문제를 제기하기도 애매할 것 같다"고 답변하였다.
내부신고 시스템의 활성화를 위한 요건
상당수의 회사는 내부신고 또는 내부고발 시스템을 두고 있다. 내부신고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임직원의 법령 또는 내규 위반행위를 조기에 발견해 조치할 수 있고, 위법행위에 대한 억지력이 생겨 분쟁 비용이 감소하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본사의 감사팀 또는 정도경영팀은 내부신고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앞선 사례처럼 정작 현장의 직원들은 내부신고 시스템을 잘 이용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벡스 글로벌(NAVEX Global)의 분석에 의하면, 내부신고 시스템이 유효하게 작동하려면 인식(awareness) · 신뢰(confidence) · 응답(responsiveness)이란 3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약 80%의 임직원들은 회사에 내부신고 시스템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다. 내부신고에 관한 임직원들의 인식을 높일 수 있도록, 회사는 내부신고 접수채널을 다원화하고 관련 교육과 홍보를 주기적으로 실시할 필요가 있다. 둘째, 많은 임직원들은 내부신고 이후의 보복이 두려워 신고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다. 회사는 신고자와 신고 내용에 대해 철저히 비밀을 유지하고, 보복 금지 정책을 구체화하여 내부신고 시스템의 신뢰성을 제고해야 한다. 셋째, 내부신고자가 오랜 고민 끝에 제보하였음에도 회사의 대응 절차가 지연되어 좌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회사는 내부신고의 접수, 상담 및 조사, 임시 조치 및 징계, 사후 모니터링 등 모든 과정에서 내부신고자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예측가능성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내부신고 시스템에서 고충처리 메커니즘으로
최근 인권경영이 화두가 되면서 내부신고(whistleblowing)를 넘어 고충처리 메커니즘(grievance mechanism)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고 있다. 내부신고 시스템은 반부패 · 윤리 중심의 컴플라이언스 체계에서 발전하였는데, 임직원의 규정(code) 위반행위를 적발해 제재함으로써 직장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반면 고충처리 메커니즘은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에서 강조하는 개념으로, 회사로부터 인권 침해를 당했거나 그럴 개연성이 있는 개인이 인권 리스크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고 구제를 받는 창구의 역할을 한다.
전자는 가해자와 위반행위에 대한 제재에 초점을 두지만, 후자는 피해자와 침해행위에 대한 구제에 중점을 둔다는 특징이 있다. 횡령 · 배임 등 부패 사건은 피해자가 개인이 아니라 회사인 경우가 많고, 재발 방지를 위해서는 엄격한 사내 규율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내부신고가 접수되면 감사팀이 가해자가 어떠한 규율(법령 또는 내규)을 위반하였는지 조사하여 징계한다. 하지만 직장 내 성희롱 등 인권 사건은 피해자인 '개인'이 분명히 존재하며,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인권 사건에서는 가해자가 위반한 규정이 무엇인지 따지는 것보다, 피해자가 어떠한 침해를 입었고 사건 이전의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할 수 있다.
고충처리 메커니즘의 예방적 기능과 효과성 평가
그렇기에 기존 반부패 중심의 내부신고 시스템과 인권 기반의 고충처리 메커니즘은 조금 달리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히 고충처리 메커니즘은 인권 침해를 '예방'하는 기능이 중요하다. 유엔은 기업의 고충처리 메커니즘은 (i)임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에 열려 있어야 하고, (ii)고충이 사법 분쟁으로 확대되기 전에 이해관계자의 우려 사항을 미리 확인하여 조치할 수 있도록 운영하며, (iii)접수된 고충의 동향과 유형을 분석하여 '구조적 문제'(systematic problem)를 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인권 침해가 실제로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기업은 여러 이해관계자들이 제기한 정당한 우려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잠재적 인권 리스크를 확인하고 인권 정책과 관행을 개선할 수 있다.
두 제도의 효과성을 측정하는 관점에도 일부 차이가 있다. 미국 법무부의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 평가지침'은 내부신고 시스템의 적정성을 진단하는 기준으로 익명 신고가 보장되는지, 조사가 공정성과 전문성을 갖춰 진행되는지, 조사 결과를 모니터링하는지 등을 제시한다. 그에 더하여, 유엔은 고충처리 메커니즘의 효과성을 평가하는 요소로 취약 집단에게도 접근성을 보장하는지, 고충을 제기한 당사자가 공정하게 대우받고 관련 정보를 제공받는지, 제도의 설계 및 운영 과정에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지 등을 살핀다(UNGPs 31조). 고충처리 메커니즘은 이해관계자들과 대화를 통해 더욱 심각한 인권 침해를 예방하는 수단으로 기능할 때 비로소 유효하다.
고충처리 메커니즘의 과제
우리 기업의 관행도 조금은 변화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사내 감사조직이 가해자에 대한 조사 · 징계 위주로 내부신고 시스템을 운영해 왔다. 다만, 감사조직의 경직된 업무 관행은 내부신고자나 피해자의 마음에 다가가지 못했고, 엄벌주의 문화는 오히려 고충의 제기를 망설이게 했다. 이제 내부신고를 수동적으로 기다려 대응하기보다는 이해관계자들의 고충에 능동적으로 다가가는 방안을 고민할 시점이다. 피해자가 회복될 수 없는 인권 침해를 겪기 전에, 회사는 직원들이 주변에 자연스럽게 고충을 상담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우려 사항을 미리 확인하고 해결할 수 있다.
유럽연합은 2019년 10월 '내부신고자 보호지침'을 채택하여 50명 이상의 근로자를 둔 사기업은 의무적으로 내부신고 시스템을 마련하도록 하였다. 독일은 2021년 6월 '공급망 실사법'을 제정하여 간접 협력사가 유발한 인권 · 환경 리스크도 고충처리 메커니즘을 통해 접수받도록 하였다. 우리나라도 근로기준법, 남녀고용평등법, 근로자참여법, 중대재해처벌법 등에 내부신고 및 조사, 고충처리, 종사자 의견청취 규정을 두고 있다. 기존 법제도를 잘 활용하되, 기업의 규모와 특성에 맞게 고충처리 메커니즘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민창욱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cwmin@jipyo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