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걸타임즈 커버스토리] 다시 주목받는 '로펌 위치의 경제학'
"종로를 아시아 법률서비스의 중심지로 만들자"
기업에 대한 법률자문을 주로 하는 한국 로펌의 역사는 광화문 일대에서 시작되었다. 김흥한 변호사가 시작한 한국 최초의 로펌, 김장리 법률사무소가 1958년 문을 연 곳이 광화문의 조선일보사 뒷골목으로, 당시 이름은 '변호사 이태영 김흥한 법률사무소'였다. 이어 4.19 이후 장대영 부장판사가 법복을 벗고 합류하며 '김장리'로 이름을 바꾸고, 태평로의 대한일보빌딩으로 옮겨 새로운 법률사무소를 시작했다고 김흥한 변호사의 자서전 《여든에 돌아보다》에서 전하고 있다.
또 미 남감리교대 유학에서 돌아와 1962년 광화문에 특허 전문 개인변호사 사무실을 낸 이병호 변호사가 68년 김창규 변리사와 함께 대한일보빌딩에서 중앙국제법률사무소를 열었으며, 김진억 변호사는 1967년 종로의 3.1빌딩에서 나중에 김신유로 발전한 국제변호사 사무실을 시작했다. 김신유는 이후 2006년 1월 아셈타워에 자리잡고 있는 법무법인 화우와 합칠 때까지 종로의 이마빌딩에서 국제업무 등 기업자문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김신유, 3.1빌딩에서 시작
김앤장이 문을 연 것은 1973년. 광화문의 구세군빌딩에서 시작, 이후 세양빌딩으로 옮긴 후 노스게이트빌딩, 적선현대빌딩, 센터포인트빌딩, 정동빌딩에 이어 최근에 입주한 크레센도빌딩까지 광화문의 터줏대감처럼 이 일대의 여러 빌딩에 변호사들이 상주하고 있다.
정부과천청사와 강남이 개발되기 전으로, 정부 부처들이 세종로에 몰려 있고, 대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중앙지방법원도 서소문에 있을 때였으니 로펌을 설립한다면 이 지역에 자리를 잡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광장, 한진빌딩에서만 34년째
1977년에 설립된 한미합동법률사무소, 지금의 법무법인 광장은 남대문로의 한진빌딩에서, 법무법인 태평양의 설립자인 김인섭 변호사는 1980년 법원 청사 인근인 서소문의 배재빌딩에 법률사무소를 연 데 이어 6년 후 태평양으로 간판을 바꿔달며 대법원 정문 옆의 신아빌딩으로 자리를 옮겼다.
올 들어 새 CI를 선포한 법무법인 세종도 나중에 대한변협 회장을 역임한 신영무 변호사가 주도해 1983년 3월 종로 1번지 교보빌딩에서 출범했다. 영어식 이름 'SHIN & KIM'과 함께 세종로에 둥지를 틀어 세종이란 이름을 내걸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1989년 9월 서초동에 서울법원청사가 준공되어 서울고법과 서울중앙지법이 강남으로 건너가고, 6년 후인 1995년 10월 대법원도 서초동으로 이전하면서 서초동 일대와 테헤란로를 따라 크고 작은 법률사무소, 로펌들이 진용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른바 로펌들도 '강남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이후 한국의 로펌업계는 강북과 강남 로펌으로 나뉘어 경쟁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1989년 서울고 · 지법 서초동 이전
테헤란로에 가장 먼저 사무소를 마련한 로펌으론 IMF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7월 삼성역 인근의 섬유센터에 입주한 법무법인 율촌을 꼽을 수 있다. 1992년 8월 우창록 변호사가 김앤장에서 독립해 서초구 반포동의 대정빌딩에서 '변호사 우창록 법률사무소'란 간판을 내걸고 홀로서기를 시작한 이후 5년 만에 법인으로 조직을 확대개편하며 법원 근처를 떠나 비즈니스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으로, 율촌은 이후 섬유센터에서 2017년 10월 섬유센터 건너편의 파르나스타워로 이전하기까지 20년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율촌은, 율촌의 성장사를 소개한 단행본 《율촌 20년》에서 새로운 사무실의 위치로 서초동에서 테헤란로 삼성역 쪽으로 눈을 돌린 이유로, "변호사 사무실은 법원이나 검찰청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발상을 전환하여, 현재 비즈니스가 왕성하고 앞으로 발전 가능성이 높은 지역, 즉 법원이나 검찰청보다 고객이 찾기 쉬운 장소로 정하기로 했다. 미국 로펌들의 위치를 벤치마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미국 로펌들 위치 벤치마크"
《율촌 20년》에 나오는 당시 에피소드 하나. 섬유센터가 율촌 파트너 변호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당시 건물주가, 율촌이 알려지지 않은 소형 사무소라는 이유로 거절하는 바람에, 율촌에선 차선책으로 공항터미널 맞은편에 있는 다른 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기로 하고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인 2000만원의 계약금까지 치렀다고 한다. 그런데 섬유센터에 입주하기로 했던 대기업 한 곳이 계약을 취소하는 바람에 율촌 경영진이 다른 빌딩 입주를 위해 지급했던 계약금을 떼이는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섬유센터에 둥지를 틀기로 결정, 섬유센터에 입주하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태평양, 98년 3월 한국타이어빌딩 입주
그러나 본격적인 로펌 강남시대의 개막은 강북의 서소문에서 메이저 로펌 중 하나로 발전을 거듭하던 법무법인 태평양이 98년 3월 역삼역 인근의 한국타이어빌딩에 입주하면서 가속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태평양의 강남 이전은 서울법원 청사의 서초동 이전에 뒤이은 큰 사건이었으며, 이미 섬유센터에 자리를 잡은 율촌을 비롯해 이후 법무법인 동인, 영진, 대륙아주, 바른, 로고스, 아셈타워에 위치한 법무법인 화우까지 주요 로펌들이 줄지어 늘어서며 테헤란로가 강남의 로펌타운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테헤란로 주변은 2000년 전후 이른바 테헤란 밸리를 중심으로 벤처붐이 일자 IT 벤처들을 따라 벤처 전문을 표방한 중소 로펌들이 이 일대로 몰려들며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지금도 집단소송 전문인 법무법인 한누리와 IT 부티크인 민후, IP 전문의 법무법인 다래, AIP특허법률사무소, 법무법인 에이펙스, 노동법 전문의 법무법인 아이앤에스, M&A 등 기업법무 부티크인 법무법인 LAB 파트너스, 조세 전문의 법무법인 가온, 적하보험 사건을 많이 취급하는 법률사무소 지현과 보험 전문의 법무법인 소명, 의료사고와 통증소송 전문인 법무법인 서로, 송무 사건에서 이름이 높은 엘케이비앤파트너스 등 크고 작은 수많은 로펌들이 제각각 경쟁력 있는 전문분야를 내걸고 강남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또 법무법인 강호와 스타트업 전문의 세움과 디라이트, 세종 출신의 이승재 변호사가 이끄는 리앤파트너스, 법무법인 세한, 에스앤엘 파트너스, 뱅뱅사거리 쪽의 법무법인 원, 가로수길의 법무법인 현, 2019년 1월 문을 연 IP 전문의 법률사무소 그루, 봉은사로에 위치한 스타트업 로펌인 법률사무소 위어드바이즈, 올 초 국제중재 플랫폼을 내걸고 대한상사중재원이 위치한 트레이드타워에 사무소를 연 법무법인 피터앤김 등 여러 로펌이 강남 지역에 포진해 실력을 뽑내고있다. 디라이트는 회의실, 세미나장 등을 입주사들과 함께 사용하는 공유오피스에 사무실을 마련한 것으로 유명하다.
법무법인 태평양이 강북의 종로로 이전하기로 함에 따라 대형 로펌들은 강북에 상대적으로 많이 위치하고 있으나, 로펌 전체적으로는 강남에 문을 연 숫자가 더 많은 편이다.
화우, 21년째 아셈타워 차지
법무법인 화우는 1989년 서울 남대문로의 상공회의소빌딩에서 설립된 법무법인 우방과 1993년 송무 전문으로 출발한 법무법인 화백이 2003년 합병해 탄생한 합병 로펌으로, 당시 우방이 강북을 떠나 화백이 이미 입주해 있는 아셈타워로 옮기며 아셈타워가 화우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화백은 서초동 법원 앞에서 출발했으나 변호사가 늘며 2000년 아셈타워에 입주, 이후 우방과 합쳐 화우로 발전하며 21년째 아셈타워를 차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각기 송무 분야와 기업자문이 발달한 두 로펌의 성공적인 합병이란 평가를 들었던 화백과 우방의 합병 과정에서 사무실 이슈도 합병을 촉진시킨 요소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당시 아셈타워 22층을 쓰고 있던 화백은 이 건물의 23층이 비게 되자 사무실 확장을 염두에 두고 미리 23층을 임대해 전대차를 놓고 있었는데, 전대차 기간이 끝나게 되어 전대차 갱신 등 적잖은 고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방과의 합병으로 강북에 있던 우방 변호사들이 아셈타워로 옮기며 자연스럽게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
또 우방도 상공회의소 빌딩이 리모델링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사무실을 확보해야 했으나 화백과 합쳐 아셈타워로 옮기며 발전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사무실을 어디로 정할 것인가의 문제는 합병 로펌의 이름과 함께 로펌이 합병할 때 의견이 갈릴 수 있는 뜨거운 이슈 중 하나로, 한 강북 로펌과 강남에 위치한 로펌이 이름을 같이 쓰는 브랜드 공유까지 갔다가 사무실 위치 등을 놓고 의견이 갈려 결국 합병이 무산되기도 했다.
세종, 1년 전 광화문으로 옮겨
율촌, 화우 등 여러 로펌이 강남에서 발전을 거듭하는 가운데 한국 로펌의 역사가 시작된 강북의 광화문 일대에선 김앤장, 광장, 세종, 지평 등 주요 로펌들이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특히 법무법인 세종이 1년 전 남산 기슭의 스테이트타워를 떠나 36년 전 법률사무소를 시작했던 교보빌딩 인근의 D타워로 사무실을 옮기고, 22년 전 강북에서 강남으로 옮기며 강남시대를 열었던 법무법인 태평양이 3월 중 종로의 센트로폴리스로 이전하며 다시 강북으로 유턴하기로 하면서 광화문-종로 지역이 한국의 로펌가로 다시 조명을 받고 있다.
태평양의 강일 변호사는 태평양의 강북 이전과 관련, "대한민국 종로를 아시아 법률서비스의 중심지로 만들자는 취지에서 새 사무실의 위치로 종로를 선택한 것"이라며 "김앤장, 광장, 세종 등 국내 주요 로펌들과의 선의의 경쟁을 통해 한국 법률시장의 발전을 한층 가속화시키려 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로펌 변호사들은 무엇보다도 사무실 위치의 선택과 관련, 고객의 편의를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대한변협 제1국제이사를 맡고 있는 세종의 이동률 변호사는 "스테이트타워남산이나 D타워 둘 다 좋은 건물이고, 건물 자체의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로펌 사무실은 주변 입지나 환경이 중요한데, 아무래도 고객사들이 4대문 안에 많아서 그런지 광화문으로 나오니까 편하고 좋다"고 1년간 D타워에서 자문한 소감을 전했다.
이제, 설립 5년 만에 강북으로 이전
또 강남의 삼성동에 있다가 지난 2월 초 종로의 SC제일은행빌딩으로 이전한 공정거래, 노동법 분야 등이 발달한 법무법인 이제의 한 관계자도 "기업사건이라는 게 사내변호사나 다른 변호사들 소개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기업체도 강북에 많지만 기업체에 근무하는 사내변호사 분 등을 자주 만나고 접촉하기 위해서도 강북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정보교류도 강남보다는 강북이 보다 유리한 것 같다"고 이전 배경을 설명했다. 이제는 김앤장 출신 변호사들이 주축이 되어 2015년 3월 삼성역 인근에서 출범한 지 5년만에 강북으로 사무소를 옮긴 경우다.
이와 함께 정부 인 · 허가 등의 해결을 위한 주요 정부부처에의 접근성, 송무 사건의 효율적인 진행을 위한, 법원과 검찰이 위치하고 있는 서초동 법원청사와의 거리도 로펌의 사무실 위치를 정하는 데 중요 고려사항 중 하나로, 로펌에 따라서는 서초동에 송무팀을 위한 별도의 사무실을 운영하는 곳도 없지 않다. 또 판교에 많이 위치하고 있는 스타트업 고객을 겨냥해 판교사무소를 따로 두고 있는 로펌들이 적지 않은데, 법무법인 태평양과 세종, 넥서스, 한결 등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강북의 광화문-종로 지역엔 김앤장이 최근 입주한 크레센도빌딩을 시작으로 종로 1번지 교보빌딩에 위치한 법무법인 한결, D타워의 세종, 종로구청 뒤 석탄회관빌딩에 위치한 법무법인 KCL, 김재헌 변호사가 이끄는, 이마빌딩에 자리 잡은 법무법인 천고, SC제일은행빌딩의 법무법인 이제, 센트로폴리스에 입주할 예정인 법무법인 태평양으로 이어지며 종로대로를 따라 주요 로펌들이 줄지어 포진하고 있다. 또 남대문로의 법무법인 광장과 종로의 타워8에 있다가 얼마 전 청계천로 시그니처타워로 옮긴 국제중재와 M&A 전문의 법무법인 KL 파트너스, 페럼타워에 위치한 법무법인 기현, 부영태평빌딩에 위치한, 한국 1호 로펌 김장리까지 역사가 이어지는 법무법인 양헌, 인근의 신한은행빌딩에 자리 잡은 법무법인 충정, 퇴계로에 위치한 법무법인 남산, 서대문 쪽의 법무법인 지평과 리인터내셔널이 함께 경쟁력을 뽐내고 있으며, 법무법인 세경과 선율, 법률사무소 여산, 오로라 등 해상 부티크와 보험 전문의 법률사무소 광화 등이 함께 광화문과 서소문 등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 문을 연 킴앤파트너스도 경복궁이 바라보이는 케이트윈타워에 사무실을 차렸다.
넥서스, 여의도에 둥지
이와 함께 M&A 등 회사법 자문과 부동산 분야가 발달한 법무법인 넥서스가 증권사 등이 몰려 있는 여의도에 둥지를 튼 가운데 SOC 자문을 많이 하는 법무법인 제현과 삼성증권 법무팀장을 역임한 김의창 변호사와 삼성전자 법무팀에 이어 군인공제회 법무팀장과 효성 법무실장으로 활약한 이상국 변호사가 공동대표로 있는 법무법인 상상도 여의도에 위치하고 있다.
강북과 강남, 여의도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의 로펌지도는 서울의 확장과 법원과 검찰청, 정부 청사의 이전, 주요 기업 본사의 위치를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측면이 없지 않다. 또 한국 로펌들이 경쟁력을 키워가며 꾸준히 발전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주요 로펌들의 지리적 입지가 로펌들의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해온 것으로 보인다.
세종, 광화문으로 옮겨 매출 2000억 돌파
1998년 한강을 건너며 강남시대를 열었던 태평양은 22년간 테헤란로 초입에 자리를 잡고 특허법인을 포함해 한국로펌 중 2위인 연매출 3000억원의 굳건한 성장을 일구어냈으며, 1년 전 남산 기슭에서 광화문으로 다시 진출한 세종도 지난해 매출 2000억원을 돌파하는 등 광화문 이전 원년을 성공적으로 장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구성원들의 전문성, 경쟁력 못지않게 로펌의 위치, 입지도 로펌의 발전에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6대 로펌만 놓고 보면 강북 3곳, 강남 3곳에서 태평양이 종로로 이전하며 4대 2의 구조로 다시 광화문-종로에 무게중심이 쏠린 형국. 여기에다 외국 로펌들의 서울사무소가 을지로와 종로, 광화문 일대에 집중적으로 위치하고 있어 이 지역이 한국의 로펌가로 뜨거운 조명을 받고 있다. 강북과 강남, 여의도로 나뉜 '로펌 위치의 경제학'이 각각의 로펌들과 한국 로펌업계의 발전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리걸타임즈 김진원 기자(jwkim@legal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