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ICO 규제 동향의 시사점

[유정한 변호사]

2018-04-09     김정덕
거래소를 매개로 한 암호화폐 투자열풍은 올 들어 한 풀 꺾였지만, ICO(Initial Coin Offering) 시장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코인데스크 통계에 따르면, 전 세계 누적 ICO 규모는 2015년 말 4천만 달러 수준에서 올해 2월 중순 70억 달러를 돌파했다.

ICO 규모 70억$ 돌파

ICO를 법적 · 실무적 측면에서 어떻게 정의할 지는 아직 논의가 분분하지만, 일반적으로 "블록체인 플랫폼 사업을 영위(계획)하는 사업자가 초기 사업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들에게 블록체인에 기반하여 신규 코인(토큰)을 발행하고, 그 대가로 투자자들로부터 현금 또는 이미 발행되어 유통되고 있는 암호화폐를 받는 자금조달기법"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자금을 조달한다는 점에서 IPO(Initial Public Offering)와 유사한 면이 있다.

ICO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가가 스위스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작년에 이루어진 자금조달 규모 상위 10개 ICO 건 중 4건(Tezos, Bancor, The DAO, Status)이 스위스에서 이루어졌다.

작년 1월부터 10월까지 이루어진 ICO를 국가별 규모로 분류했을 때 스위스(5억 5천만 달러)는 미국(5억 8천만 달러)에 이어 2위였는데(3위는 싱가포르 1억 8,400만 달러), 스위스의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상당히 높은 비중이다.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몰려들어 블록체인 기반의 사업과 ICO를 준비하고 있는 스위스 취리히 인근의 주크(Zug) 지역은 '크립토 밸리(Crypto Valley)'로 불린다.

스위스가 ICO 허브로 각광받는 이유로는 풍부한 고급 기술인력 및 IT 인프라, 선진 금융시스템, 정치적 안정성 등이 꼽히는데, 무엇보다도 스위스 감독당국이 블록체인 산업과 기술 혁신에 관하여 취하고 있는 전향적이고 유연한 정책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스위스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암호화폐의 발행 · 중개 · 거래에 대한 직접적 · 포괄적인 규율체계를 두고 있지 않다. 그렇지만 스위스 감독당국은 기존 규제의 틀 내에서 가능한 한 예측가능성 있는 기준을 제시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예측가능한 기준 제시 주목

스위스 금융시장감독청(The Swiss Financial Market Supervisory Authority, 이하 'FINMA')은 2017. 9. 29. 「Regulatory treatment of initial coin offerings」(FINMA Guidance 04/2017)라는 행정지도를 발표했다(이하 'ICO Guidance'). FINMA는 ICO Guidance에서 분산원장 및 블록체인 기술의 혁신적 잠재성을 인정하고, 스위스 금융산업에 블록체인 솔루션을 개발 · 도입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환영하고 이를 지원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FINMA는 기술, 기능 및 영업적 측면에서 ICO가 다양한 구조를 취할 수 있으므로 이를 포괄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하면서, 개별 ICO의 내용에 따라 기존 법령의 적용 영역이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두 차례 가이드라인 발표

그 예로 (i)ICO에 따라 발행되는 토큰이 지급수단(payment instrument)에 해당한다고 평가될 경우 자금세탁방지법(Anti-Money Laundering Act)이 적용될 수 있고, (ii)ICO를 한 회사가 참여자들에게 일정한 의무(가령 투자금을 반환할 의무)를 부담할 경우 은행업 법령상 라이선스 규제가 문제될 수 있으며, (iii)ICO로 발행되는 토큰이 증권 · 파생상품의 요건을 충족한다면 토큰을 매매 · 중개하는 자(dealer)에 대하여 증권 관련 법령 규제가 적용될 수 있고, (iv)ICO로 조달한 자산이 외부기관에 의해 관리 · 운용되는 경우, 집합투자기구 관련 법령이 적용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FINMA는 2018. 2. 16. 「Guidelines for enquiries regarding the regulatory framework for initial coin offerings」(이하 'ICO Guidelines')를 발표했다.

ICO Guidelines는 기존 ICO Guidance의 취지에 맞춰 규제기준을 보다 세밀하게 다듬은 것으로, 주로 위 (i) 및 (iii)과 관련된다. ICO Guidelines는 토큰이 표창하는 경제적 기능(underlying economic functions)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했다.

①지급형 토큰(Payment tokens)은 재화나 서비스 구매에 대한 지급수단, 또는 현금(가치) 이전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토큰이다. 지급형 토큰은 증권으로 취급되지 않고 자금세탁방지법령상 '지급수단(means of payment)'에 관한 규제를 받는다.

②기능형 토큰(Utility tokens)은 블록체인에 기반한 애플리케이션 또는 서비스에 전자적 방식으로 접근할 권한을 부여받은 토큰이며, 역시 증권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다만 기능형 토큰이라 하더라도 발행 이후 미래 시점에 이르러야 실제 사용할 수 있고 이와 같은 미래의 사용권한이 거래대상이 된다면(즉 투자목적이 인정된다면), 증권으로 취급된다.

투자목적 인정되면 증권 취급

③자산형 토큰(Asset tokens)은 토큰 발행인에 대한 주주로서의 권리 또는 채권자로서의 권리 등 일정한 자산(asset)을 표창하는 토큰을 말하며, 증권으로 규제된다.

가령 ICO로 발행된 토큰이 발행회사의 미래수익이나 현금흐름에 대한 권리를 표창하고 있다면 경제적 기능면에서 주식, 사채 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한편 위 ①부터 ③까지의 속성을 겸유하는 하이브리드 토큰(hybrid tokens)도 존재할 수 있고, 이 경우 중복규제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앞서 ICO Guidance에서 본 바와 같이 토큰이 표창하는 권리의 내용이나 ICO로 조달한 자금의 관리방식에 따라서는 은행업이나 집합투자기구 관련 법령도 적용될 수 있다.

참고로 FINMA는 시장참여자들의 불확실성을 해소해 주기 위해 (소정의 수수료를 받고) 개별 ICO 프로젝트에 적용되는 규제에 관해 사전 검토를 해주는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FINMA의 적극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는 금융당국에서 작년 9월 기술 · 용어 등에 관계없이 모든 형태의 ICO를 금지할 것이라는 방침을 밝힌 이후 후속조치가 나오지 않고 있다.

ICO로 발행되는 토큰이 발행회사나 대상 프로젝트에 대한 일정한 권리나 지분을 표창하는 경우 자본시장법상 증권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고, 이에 대해 증권신고서 및 투자설명서 등 규제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시장참여자들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다.

그런데 증권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토큰을 발행하는 경우에 대하여는 정부의 불허 '방침'만 있을 뿐 이를 뒷받침하는 입법이나 가이드라인이 없어서 혼선이 발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 기업들이 ICO 환경이 우호적인 외국에 법인을 설립하여 ICO를 추진한다는 소식도 종종 들린다.

외국 가서 ICO 소식도

우리나라에서 ICO를 하는 것은 전면 금지되어 있다고 치더라도, 외국에서 이루어지는 ICO에 한국 투자자들이 참여하는 것도 금지되는가? 외국 회사는 한국 투자자들에게 ICO 마케팅을 제한 없이 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 은행실무상 블록체인 관련 사업자금이나 암호화폐 구매 목적으로 외국으로 현금을 '송금'하는 것은 사실상 금지되어 있다. 그렇지만 투자자들이 암호화폐를 블록체인에 기반하여 전송하는 것까지 통제하기는 어렵다.

시세가 형성되어 거래되는 암호화폐를 해외로 전송하는 것은 실물화폐를 송금하는 것과 다름없다. 무분별한 ICO로부터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ICO 전면 금지 입장을 밝힌 것인데, 규제 공백이 장기화되다 보니 결국 투자자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한 상태에서 일부 사기성 ICO에 투자하여 국부가 유출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시장참여자들이 규제의 '강도'보다 혐오하는 것이 규제의 '불확실성'이라고 한다. 우리나라가 암호화폐, 나아가 ICO에 대한 제도 정비를 더 미룰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위스의 예에서 본 것처럼 암호화폐나 ICO에 대한 완결적인 정의 규정과 제도를 처음부터 도입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추후 다른 입법이나 제도의 도입 가능성을 열어놓더라도) ICO에 대해서 예측가능성 있는 샌드박스를 한시적이라도 도입하는 방안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시적 샌드박스 도입 필요

자본시장법상 IPO 규제에 착안하여 ICO를 추진하는 회사들이 임의로 작성하고 있는 백서(white paper)를 일정한 양식(IPO보다는 간이한 양식)에 따라 작성하게 하고 이를 감독당국에서 사전 검토하여 투자자들에게 제공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해당 양식에는 ICO를 추진하는 사업주체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과 블록체인 사업에 대한 설명, 그리고 투자자들이 인지하고 있어야 할 위험요소 등이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기술적 요소에 대해서는 블록체인 전문가의 검토의견을 추가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해외 ICO와 관련하여서는, 외국 회사가 한국 투자자들에게 ICO 마케팅을 하고자 할 경우 (외국 펀드의 한국 판매등록제도와 유사한 취지에서) 한국 금융당국에 사전에 등록하거나 위와 같은 ICO 양식에 준하여 주요 내용을 공시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어 보는 것도 고려해 봄직하다.

ICO 논란의 이면에는 4차 산업혁명과 블록체인 산업에 대한 기대, 그리고 기술인력 · 자본의 해외유출에 대한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ICO와 블록체인 산업이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변화할지 아직 예측하기도 어렵고 불확실성도 크다.

그렇지만 스위스를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이와 같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시장참여자의 혁신을 독려하면서 합리적인 규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우리도 글로벌 추세에 발맞추어 과감하고 순발력 있는 대응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다.

유정한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jhyoo@jipy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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