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슈빈 사건-중국판 '재심' 사건

[김종길 변호사]

2017-06-30     김정덕
얼마 전 화제를 끌었던 영화 '재심'이 다루는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과 쌍둥이처럼 닮은 사건이 중국에도 있었다. 바로 네슈빈(聶樹斌)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무고한 사람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재판에서 유죄로 확정되나, 그 후에 진범이 나타난다. 진범이 나타난 이후에도 사법기관은 진실을 인정하는 데 완강하게 저항하지만, 변호사, 매체, 가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결국 무죄를 선고받는다.

재심에서 무죄 선고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은 2000년 8월 택시기사가 살해되고, 최 모가 진범으로 몰려 1심에서 15년형, 2심에서 10년형을 받아 확정되었는데, 2003년 6월 진범이라고 주장하는 김 모가 나타나고 김 모의 진술이 최 모의 진술보다 더 신빙성이 있음에도 검찰은 최 모가 범인이라는 입장을 유지하다가, 결국 2016년 11월 17일 최 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다.

네슈빈 사건은 1994년 8월 하북성 석가장시 서쪽교외의 한 옥수수밭에서 공장여공 강(康) 모(37)가 강간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네슈빈이 진범으로 몰려 1심, 2심에서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1995년 4월 2심 판결 선고 이틀 후에 사형집행까지 이루어진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2005년 1월경 다른 강간살인사건으로 체포된 왕슈진(王書金)은 자신이 강 모를 강간살해하였다고 자백하고, 그의 진술은 네슈빈의 진술보다 훨씬 신빙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기관은 네슈빈 사건을 번복하는데 소극적이었다. 이후 가족, 변호사, 매체의 끊임없는 노력 끝에 결국 2016년 12월 2일 최고인민법원은 원판결을 취소하고 네슈빈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네슈빈 사건은 무죄 선고를 받기까지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보다 훨씬 복잡하고 지난한 경위를 거쳤다. 1995년 8월 5일경 공장여공 강 모가 실종된다. 실종 후 5일 정도 지난 후 그녀의 부친은 실종신고를 내고, 주변을 수색하다가 8월 10일 그녀의 옷가지를 먼저 발견하고, 8월 11일 강간살해당한 그녀의 시신을 발견한다.

한 달여 지난 9월 23일 인근 공장의 용접공인 네슈빈은 공안(우리나라의 경찰)에 고의살인 및 부녀강간 혐의로 연행된다. 그리고 10월 1일 형사구류(刑事拘留, 우리나라의 체포에 해당)되고, 10월 9일 체포(逮捕, 우리나라의 구속에 해당)된다. 12월 6일 검찰은 고의살인죄 및 부녀강간죄로 석가장시중급법원에 기소하고, 석가장시중급법원은 1995년 3월 15일 고의살인죄에 대하여 사형, 부녀강간죄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네슈빈은 항소했고 항소법원인 하북성고급인민법원은 1995년 4월 25일 고의살인죄에 대하여 사형, 부녀강간죄에 대하여 15년형을 내리며, 고의살인죄와 병합처벌하여 사형을 집행하도록 선고한다. 그리고 이틀 후 총살형을 집행한다.

이틀 후 총살형 집행

이 사건으로 부친 네쉐셩은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침대에 누워 지내는 신세가 되었고, 모친 장환즈는 이때부터 쉰살의 보통 농촌부녀에서 사방을 돌아다니며 아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투사'로 변신한다.

10년이 흐른 뒤인 2005년 1월 17일 강간살인으로 지명수배를 받던 왕슈진이 체포되는데, 그가 자백한 4건의 강간살인사건 중에는 석가장시의 옥수수밭에서 저지른 강간살인사건도 있는데, 바로 네슈빈이 진범으로 몰려 사형집행된 그 사건이었다. 같은 해 3월 15일 의 기자 마윈롱은 "1개의 사건 2명의 범인, 누가 진짜 범인인가(一案兩凶, 誰是眞凶)"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고, 왕슈진이야말로 진범이고 네슈빈은 억울하다고 보도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러나 검찰은 왕슈진을 기소하면서 옥수수밭 강간살인사건을 제외한 3건의 강간살인사건만 포함시켰고, 2007년 3월 12일 한단시중급인민법원은 왕슈진에 대하여 고의살인죄에 대하여 사형을, 부녀강간죄에 대하여 14년형을 내리고, 두 형을 병합하여 사형의 집행을 선고했다.

진범이 처벌해달라고 항소

왕슈진은 이 판결에 대하여 하북성고급법원에 항소하는데, 항소이유가 이례적이다. 바로 자신이 옥수수밭 강간살인사건을 저질렀으니 그것도 처벌해달라는 것이었다. 하북성고급법원은 사건접수 후 2007년 7월 제1차변론기일을 열고 6년간 아무런 조치도 없다가 2013년 6월과 7월에 2번 변론기일을 연다. 변론에서 피고인이 스스로 진범이라고 극력 주장하고, 검찰은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상한 장면이 펼쳐졌다.

매체와 여론은 이 사건에 엄청난 관심을 집중하는데, 왕슈진이 유죄인지 아닌지보다 네슈빈이 무죄인지 아닌지가 주요 관심사였다. 하북성고급법원은 2013년 9월 27일이 되어서야 2심 판결을 선고하는데, 옥수수밭 강간살인사건은 왕슈진의 진술과 부합하지 않으므로 왕슈진을 진범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여론의 뭇매를 맞는다.

이 사건에서 장환즈와 변호사들이 겪은 고충은 약촌오거리 사건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장환즈가 최고법원에 신소(申訴)를 신청하려고 하자, 최고법원은 네슈빈의 판결문을 가져와야 한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절한다. 그러면서 법원에 판결문을 발급해달라고 요구하면 법원은 판결문을 재발급할 의무가 없다는 이유로 역시 거절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2년여를 보낸 장환즈는 결국 2007년 부대민사소송을 제기하여 판결문을 가지고 있던 피해자인 강 모의 가족을 찾아가서 간곡하게 부탁한 끝에 판결문을 얻을 수 있었고 그 판결문을 가지고 정식으로 '신소'를 제출할 수 있었다.

판결문 구하는 데 2년 걸려

그러나 신소를 받은 최고인민법원은 즉시 해당 판결을 내린 하북성고급법원으로 보내버렸고, 하북성고급법원은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1달에 1번씩 법원을 찾아간 장환즈에게 하는 말이 항상 똑같았다. "기다려라!" 법원은 묵살을 선택했지만, 매체와 여론의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은 계속 되었다. 매년 열리는 전인대와 정협에서 대표들이 네슈빈 사건을 거론하고, 하북성고급법원원장은 기자들에게 네슈빈 사건에 대하여 추궁받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진정한 계기가 마련된 것은 2014년 12월 12일, 최고법원이 산동성고급인민법원으로 하여금 네슈빈 사건을 재조사(復査)하라고 지시한 이후이다. 최고법원이 재조사를 결정한 사유도 재미있다. "하북성고급법원의 신청에 따라" 재조사를 결정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하북성고급법원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 '최초' 기록을 많이 보유하게 되는데, 최고법원이 고급법원이 내린 판결에 대하여 다른 고급법원으로 하여금 재조사하도록 한 최초의 사례가 된다. 재조사 자체는 법원의 내부절차이지만 이는 재심을 위한 기초가 되므로 의미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중국은 재심사유가 우리나라보다 광범위하다).

다른 고급법원이 재조사

2015년 3월 17일에는 네슈빈 사건의 변호사들이 산동성고급법원에서 처음으로 사건기록을 열람하고 복사할 수 있었다. 네슈빈 사건기록 3권, 왕슈진 사건기록 8권, 하북성 조사팀 기록 6권. 이전까지 이들은 여러 번 사건기록 열람을 신청했으나, 사건기록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2015년 4월 28일에는 청문회를 개최하여 네슈빈의 가족, 대리인 그리고 사건담당부서의 대표가 참석하여 의견을 진술하는데, 이것도 중국에서 재조사와 관련하여 최초로 개최한 청문회이다.

산동고급법원에서의 재조사도 순탄하게 진행되지만은 않았다. 기간은 처음엔 6개월이었으나, 이후 3개월씩 4번이나 연장된다. 최종적으로 산동성고급법원은 재조사 후 다음과 같은 의견을 최고인민법원에 보낸다. "원심판결은 네슈빈이 사건을 저질렀다고 인정할만한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 피고인의 사건시간, 사건도구, 피해자 사인 등 방면에 중대한 의문이 있어, 다른 사람이 저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원심에서 네슈빈이 고의살인죄, 부녀강간죄를 범했다고 인정한 증거는 불확실하고 불충분하다. 최고인민법원에서 재판감독절차를 개시하여 새로 재판하기를 건의한다."

그리고 2016년 6월 6일 마침내 최고인민법원은 산동성고급법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네슈빈 사건에 대하여 재판감독절차에 따라 재심하기로 결정했고, 이틀 후인 6월 8일 산동성고급법원은 네슈빈의 모친에게 재심을 개시한다고 송달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2일 마침내 최고법원 재심합의부는 "원판결이 네슈빈의 고의살인, 부녀강간을 인정한 사실이 불명확하고 증거가 부족하다"며 네슈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최고법원의 무죄선고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네슈빈의 범행시간, 범행도구의 출처 및 피해자의 사망시간과 사망원인 같은 기본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네슈빈이 연행된 후 5일간의 심문기록, 사건발생 후 50일간의 중요증인의 진술기록, 그리고 네슈빈의 알리바이를 확인해줄 수 있는 회사출근부 등이 모두 멸실되어, 네슈빈 자백의 진실성과 합법성에 의문이 있고, 본사건을 다른 사람이 저질렀다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셋째, 원판결에서 채용한 증거는 관련성이 부족하여 증거가 확실하고 충분해야 한다는 유죄인정기준에 미치지 못하고, 넷째, 원판결의 사건담당 인원들의 당시의 행위나 사후의 해석이 모두 '상리(常理)'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후거 사건과 쌍둥이

이 사건과 이전에 내몽고에서 발생하고 네슈빈보다 2년 앞서 재심을 거쳐 무죄를 받아낸 후거 사건도 쌍둥이처럼 닮았다. 네슈빈은 죽을 때 21살이었는데 총살당한 후 21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아냈고, 후거는 죽을 때 18살이었는데 총살당한 후 18년만에 무죄판결을 받아냈다. 두 사건은 중국에서 사법절차에 대한 감독과 시정을 매체와 변호사, 법학교수 등 민간의 역량으로 얻어냈다는 점에서 중국사회가 법치를 향한 진일보한 걸음을 내디뎠다는 의미가 있다. 다만 후거 사건은 공안, 검찰, 법원 등 매 단계마다 관여한 인물들의 실명이 공개되었는데, 네슈빈 사건은 관여한 인물들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서, 오히려 후거 사건에 비하여 약간 후퇴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점이 아쉬운 점이라면 아쉬운 점이다.

4억 4000만위안 배상금 지급

이 사건과 관련하여 또 하나의 흥미로운 점이 있는데, 국가가 네슈빈의 부모에게 총 2,681,399.1위안(한화 4억 4000만원)에 이르는 거액의 국가배상금을 지급하였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중국에서의 교통사고의 경우, 손해배상액을 계산할 때 전체 노동자 평균급여로 계산하여 우리나라에 비하여 형편없이 적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금액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역을 보면, (1)위자료가 1,300,000위안으로 중국의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로는 최고금액이다(이전까지는 후거 사건의 1,000,000위안이었다), (2)일실수익금 및 장례비로 1,264,820위안(국가의 2015년 노동자 평균급여 63,241위안×20년으로 계산함), (3)불법구속된 기간에 대한 배상금 52,579.1위안(2015년 노동자 일당 242.3위안×217일로 계산함), (4)모친 생활비 64,000위안이다.

김종길 변호사(법무법인 동인, jgkim@donginlaw.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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