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가인인가

2014-02-06     김진원
한국 법조계의 사표인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은 1920년 판사 1년 경력을 채우고 곧바로 판사직을 사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가인이 1930년대까지 김상옥 의사 관련 사건, 의열단 사건, 광주학생운동 사건 등의 변론에 나서는 등 항일민족변호사로 활약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가인이 당시 조선총독부로부터 판사 임용을 받은 것도 법률지식을 활용하여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랬다고 한다. 가인이 민족변론을 하게 된 이유가 그의 회고록에 잘 나와 있다.

첫째 아무리 일본 경찰이라도 변호사를 쉽게 폭행하거나 구금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둘째 변호사 수입을 사회운동을 위한 자금으로 쓸 수 있고, 셋째 공개법정에서라도 정치투쟁을 전개할 수 있으며 인권옹호와 사회방위를 위한 사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인은 "내가 변호사 자격을 얻기에 유의하였다는 것은 일정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행동을 하려 함에 있었다"고 회고록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가인이 떠난 지 50년이 지났다. 그 후 우리 사회는 민주화시대를 거쳐 산업화, 정보화의 깊이를 더하며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변호사의 역할도 다양해져 전관 출신의 개인 송무변호사에서 자문서비스를 중시하는 기업법무, 국제법무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연매출 1000억원이 넘는 대형 법률회사가 잇따라 등장하고, 거대 영미 로펌들이 서울에 진출하는 등 한국 법률시장의 규모와 외연이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또 사회적 약자의 변론을 자처하는 공익전담변호사들이 위상을 뚜렷이 해 가는 가운데 거대 기업을 상대로 소비자, 투자자의 피해구제에 나서는 집단소송 변호사도 갈수록 수가 늘어나고 있다.

변호사 포화의 시대요, 변호사 분화의 시대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변호사의 모습이 다양해지더라도 의뢰인을 위해 변론하는 변호사의 임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또 단순한 상인으로 치부할 수 없는 변호사 윤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최근 법조윤리협의회가 전관예우 금지규정을 위반해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 11명을 적발, 변협에 징계개시를 신청했다. 법조윤리를 중히 여겨야 한다는 주문은 비단 전관 출신 변호사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법조윤리협의회가 문제의 심각성을 느껴 국민 눈높이에 맞는 법조윤리규범 모델 정립에 나선다고 한다. 서세 50년, 요즈음 가인의 삶이 재조명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본지 편집국장(jwkim@legaltime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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