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허분쟁 해결모델 한국에 만들자"

[한상욱 변호사]

2014-01-12     권은오
전 세계적으로 불붙고 있는 특허 등 지적재산권 분쟁과 관련, 이번호부터 한상욱 변호사의 지재 산책을 연재합니다. 한 변호사는 20년 넘게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로, 풍부한 정보와 흥미 있는 사례를 곁들여 지적재산권 분야의 주요 이슈를 알기 쉽게 풀어 낼 예정입니다. 편집자

모든 분쟁과 마찬가지로 특허분쟁도 없는 것이 제일 좋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 특허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어느 누구인가 분쟁을 유효, 적절하게 해결해 주어야 한다. 사법부의 존재의미가 여기에 있다.

IP5 특허청장 회의 개최

특허 등 지재권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이미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2008년 IP5(미국, 유럽, 중국,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를 지칭한다) 특허청장 회의를 제주도에서 개최한 이래 우리나라는 더욱 더 탄탄한 지재 강국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지재권 분야에서의 이같은 위상에 걸맞게 각국에 걸쳐서 발생하는 특허분쟁에서 한국이 더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



특허분쟁은 다른 분야의 분쟁과는 판이한 여러 가지 특성을 갖고 있다.



첫째, 동일 당사자간의 분쟁이 한 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 걸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LG와 소니의 분쟁, 삼성과 오스람의 분쟁 등 주요한 특허 분쟁은 예외 없이 여러 나라에 걸쳐서 진행된다.



둘째, 동일 논점에 대한 논의가 여러 나라에 걸쳐서 동시에 또는 시차를 두고 논의된다는 점이다. 특허 진보성의 판단을 어떻게 할지, 손해배상액 산정은 어떻게 할지 등과 같은 논점이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논의된다. 이런 이유로 한 나라 법원에서 선고한 판결이 다른 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배심원 평결까지 50억원 들어



셋째, 사정이 위와 같으므로 특허권자에게는 어느 나라에서 제소할 것인지, 제소하는 순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등 제소 나라와 순서 등이 매우 중요한 전략적인 고려사항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미국에서의 제소는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소송비용이 많이 들고 기간이 오래 걸린다는 측면이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 제소 후 배심원 평결까지 가는 경우 비용은 약 50억원, 시간도 2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럼 유럽은 어떤가? 마찬가지로 소송비용이 만만치 않고 각 나라마다 소송을 하여야 하는 문제, 언어 문제 등이 걸림돌이다. 일본은 무효율이 높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평가이며, 중국은 아직 사법절차가 완비되지 않았다는 걱정이 있다. 여기서 신뢰할 수 있는 사법시스템 하에서 소송이 신속하게 진행되고 소송비용도 많이 들지 않으며, 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우수한 법률가가 많은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특허분쟁의 해결지로서 기능할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 것이다.

넷째, 이러한 분쟁을 수행하는 당사자로서는 국가별 절차 및 실체 요건에 대한 비교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미국에는 deposition이라는 절차가 있는데 한국과 일본은 없구나, 미국에는 punitive damage(징벌적 손해 배상)가 있는데 한국과 일본은 없구나' 라는 비교가 확연하게 나타난다.

현재 한국의 사법제도, 특히 전자소송 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사법정보화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은행(World Bank) 발표 기업환경보고서 중 사법제도 평가에서 한국 사법부는 2012년 이후 3년째 세계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사법제도 평가 세계 2위

특히 올해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사흘간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된 한미 지재소송 컨퍼런스는 한국 사법부와 미국 연방 순회 항소법원 (Court of Appeals of the Federal Circuit)이 주관해 개최한 행사였는데, 나는 이 행사의 준비과정 및 진행과정에 관여하면서 우리 사법부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우리의 파트너였던 미국 법관들, 미국 변호사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컨퍼런스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 글로벌 기업들 사이에 특허분쟁이 생겼다고 하면 우리나라에 와서 해결책을 강구하게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우선 그 중 한 가지만 지적하려고 한다. 우리나라가 특허분쟁 해결의 세계적 모델이 되기 위하여 풀어야 할 첫 번째 숙제는 '손해배상액의 현실화'이다.

2009년에서 2011년까지 미국과 한국의 특허손해배상액 평균값을 비교해 보자. 미국은 평균 102억원인데 우리나라는 7800만원에 불과하다. 131배의 차이가 난다. 이는 GDP의 차이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 2010년 미국 GDP(14조 5265억달러)와 한국 GDP(1조 143억달러)는 불과 14배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102억 대 7800만원

손해배상의 기본 개념은 실손해 배상이라는 틀을 이 글에서 논박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실손해라는 것이 꼭 계산기를 두드려서 소수점 몇 자리까지 나와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특허법에는 그나마 특허권자에게 손해액 산정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규정이 있다. 특허권자의 일실이익 산정의 편의를 제공하는 규정, 침해자의 이익을 특허권자의 손해로 추정해 주는 규정 등이다. 이러한 규정들은 기본적으로 '판매된 침해제품의 수량'과 '특허권자의 이익률, 또는 침해자의 이익률'을 계산 근거로 한다.



특허침해가 발생하면 변호사, 변리사 비용이 들고 연구 개발에 관여한 사람들, 회사의 지재업무 담당자들이 많은 시간을 투입하여 분쟁 해결에 관여하여야 한다. 연구개발에 들인 막대한 비용이 배상되어야 한다고 논의될 장면이 별로 없다. 특허 침해로 인한 제품 이미지 손상도 치명적인 경우가 있고, 시장 선점기회를 놓쳐서 회복이 불가능한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한 비용이 꼭 특허침해자 때문에 발생한 것이냐? 이러한 손해들이 실제 제품 판매와 어느 정도 연결되는지 수치적으로 밝힐 재주가 없다.



손해액, 배심원이 결정

미국에서는 손해액은 배심원이 정한다. 물론 손해액 산정에 중요한 요소가 되는 점들에 대하여는 미국의 판례법(Panduit case, Georgia Pacific case 등) 상 정착되어 있어서 이러한 점들에 대하여는 판사가 배심원들에게 충분히 설명을 한다. 그런 이후에 배심원들이 이러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적정한 손해액을 정한다. 이렇게 정해진 손해배상액은 우리 시각으로는 주먹구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산정된 것은 손해배상액이 아닌가?

우리 실무도 너무 계산기로 계산되는 손해에만 집착하면 손해배상액의 '현실화'가 달성될 수 없다. 현재 특허법상의 손해배상 산정은 피고 제품의 판매수량에만 좌우되는 계산식이다. 침해품 판매수량과는 무관한 특허권자의 손해는 어디 가서 배상받을 방법이 없는 제도이다.



3배 배상의 논의에 앞서 또는 이와 동시에 실손해 배상의 원칙 하에서도 '현실적'인 손해배상이 되게 하기 위한 실무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위자료를 적극 활용하는 방안도 그 방법 중 하나이리라.



여기서 내가 미국에서 진행된 특허소송에 관여하며 경험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특허소송 1위 EDTX

텍사스 동부법원(Eastern District Court of Texas, 이하 EDTX)은 현재 특허 소송의 메카라고 불려도 될 정도로 최근 미국 내에서 특허소송이 많이 몰리는 법원이다. 2000년과 2008년 각각의 통계를 보면 미국 전체의 특허 소송은 2345건에서 2815건으로 20% 증가하였다. EDTX는 어떠한가? 20건에서 317건으로 증가하여 무려 1485%나 증가했다. 현재 미국 각주에서 벌어지는 특허소송 중 수적으로 단연 1위이다. 2008년 기준으로 미국 전역에서 벌어진 특허소송의 13%가 EDTX에서 다루어졌다. 텍사스에는 EDTX 외에도 북부, 남부, 서부법원이 각각 있지만 유독 특허소송은 EDTX에만 몰린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EDTX에 특허 소송이 몰리는 이유는 대략 3가지로 이야기된다.

첫째, 매우 신속한 재판이 이루어지도록 절차적인 규칙을 따로 지정하여 법원이 이를 강력히 운용하고 있다. 실제로 제소부터 12개월 내지 14개월 정도에 결론을 낸다. 다른 주에서는 대략 2년 이상 걸리는 데, 신속한 재판이 당사자의 비용 부담 측면에서도 매력적일 것임이 틀림없다.

EDTX, 원고 승소율 88%



둘째, 텍사스주 법원이 전통적으로 원고에게 우호적인 경향이 있어 왔고 특허사건에서는 더욱 그러한 경향이 높다. 특허사건에서 EDTX에서의 원고 승소율은 88%. 미국 전역의 원고 승소율 68%에 비해 매우 높은 수치다.



셋째, 소수의 판사들이 집중적으로 특허사건을 처리하다 보니 경험이 쌓이고 전문성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EDTX의 Tyler라는 도시에서 특허소송 기일을 준비하고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곳에 소송이 몰리다 보니 우선 호텔 잡기가 매우 어렵다. 참고로 미국 소송의 main trial 기일은 2~3주 연속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텔이라고 해 봐야 제일 좋고, 높은 호텔이 3, 4층 정도 되는 수준인, 완전 시골이지만,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날아온 유명 로펌의 변호사들이 정장을 차려 입고 큰 여행용 가방을 든 가운데 길거리를 활보하는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 연출된다. 비행기 편을 잡는 것도 쉽지 않다. 법원이 있는 Tyler 같은 도시는 특허소송이 거의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가 어색하지 않은 상황이다.

신속한 심리 위주 재판실무 개선

텍사스에 소송이 몰리게 된 흐름은 Judge Ward라는 판사가 주도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Ward 판사는 원래 특허전문 변호사였다. 변호사로서 특허 실무를 하다 보니 여러 가지 개선점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고 연방 법원 판사가 된 이후에 절차 규정의 개정을 주도하여 신속한 심리를 위주로 획기적으로 재판실무를 개선했다. 특히 조기에 쟁점정리를 위한 서면공방, 엄정한 변론행위 시한 제한의 확립(establishment of firm case deadline), 증거개시 절차의 남용에 대한 제재, 양 당사자의 변론시간을 스톱워치로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 등이 그가 주도한 재판진행의 특징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신속한 재판 진행으로 소송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재판 진행 스타일이 텍사스 동부 법원 다른 판사들에게도 옮겨 가고 이것이 차츰 소문이 나자 특허권자들이 앞다퉈 텍사스 동부법원으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특허분쟁의 허브(hub)가 되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더 앞서나가고 있는 나라가 싱가포르이다. 싱가포르는 2013년 4월에 이미 IP허브 마스터플랜을 발표했다. 3가지 분야로 나눠 ▲IP 거래에서의 허브 ▲IP 출원에서의 허브 ▲IP 분쟁해결에서의 허브가 되기 위한 계획을 밝히고 있다. 싱가포르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IP 기초가 매우 취약한 나라로 평가되는데도 이러한 발 빠른 노력을 국가적으로 기울이는 것을 우리는 눈여겨봐야 한다.

유럽 특허소송 2/3 이상 독일서 진행



독일 법원들이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평가는 없으나 유럽 특허소송의 3분의 2 이상이 독일 법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연스럽게 독일의 만하임, 뒤셀도르프, 뮌헨 지방법원이 적어도 유럽에서는 특허분쟁 해결의 허브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에게 특허란 무엇인가? 창조경제가 국가적인 화두가 되고 있는 마당에 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특허란 그간 선진국과의 협상결과물로 짐 지워진 부담스러운 존재인가? 가능하면 외면하고 떨구어 놓고 싶은 존재인가? 아니면 이제는 이를 딛고 큰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야 하는 제도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바탕으로 지금의 특허분쟁의 실무적인 제도도 새로운 시각으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우리의 내부 고민과는 무관하게 외부적으로 우리는 이미 지재선진국이다. 이제 한국이 창의적으로 제도를 제안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나라는 없다. 특정 논점에 대하여 한국 법원이 미국 판결, 유럽 판결, 일본 판결과는 다른 방향의 세계 최초의 판결을 하였다고 무시할 나라도 없다. 오히려 한국의 위상에 걸맞은 행동이라고 여길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 맞는 제도를 만들고 이를 세계에 알려 국제적인 토론을 이끌 시대가 되었다.

한상욱 변호사(swhan@kimchang.com, 김앤장 법률사무소)

◇한상욱 변호사는 1991년부터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활동하고 있는 지적재산권 분야의 전문가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하버드대 로스쿨(LLM)과 동경대 법과대학원에서 공부했으며, 한국변호사와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갖추고 있다. 《지적 재산법의 미래》 등 지재 관련 여러 권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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