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연방대법원 판결의 80%가 파기판결

김용담 변호사,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 펴내"상고기각은 낭비, 상고법원은 파기법원이어야"

2010-08-19     김진원
우리 대법원의 개혁과 관련,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연방대법원을 자주 거론한다. 과연 사법국가 미국을 이끌고 있는 미 연방대법원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떨까.

2009년 9월 대법관에서 물러나 하버드 로스쿨의 East Asian Legal Studies에서 약 1년간 방문학자(visiting scholar)로 연구한 김용담 전 대법관이 미 연방대법원을 본격 조명한 책을 펴냈다. 책 이름도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로 읽는 우리 법원".

7월 1일부터 법무법인 세종의 대표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는 김 전 대법관은 "2007~2008, 2008~2009년의 미 연방대법원 판결을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우리 법원의 모습과 대비되는 것을 틈틈이 메모해 두었다"며, 모두 13개의 장으로 나눠 판결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미 연방대법원의 기능과 역할 등에 대한 얘기를 풀어가고 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상소법원=미 연방대법원은 재심사를 구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판결할 대상을 자율적으로 정하여 상고를 허가하는 certiorari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매년 상고를 허가하는 건수는 상고허가여부심사 건수의 1% 내외로, 그 비율은 1990년 이후 거의 변함이 없다. 상고허가 건수는 2004년 80건, 2005년 78건, 2006년 77건, 2007년 95건, 2008년 87건이다. 2008년에 상고가 허가된 87건 중 의견을 부친 판결을 한 경우는 83건이다. 여기서 2008년이라 함은 2008년의 회기 즉, 2008년 10월 첫째 월요일부터 2009년 6월말까지 사이를 말한다.

83건 중 5건은 항소법원들 사이에 견해가 나뉜 것들에 대해 법령해석의 통일을 기하는 판결, 또 8건은 형사실체법의 구성요건 해석에 관한 판결이다. 김 전 대법관은 "판결문을 보면, 단어의 해석과 문장의 구문론으로 잘 짜여 있어, 마치 우리나라의 영어 문법책을 읽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라며, "그만큼 문리해석에 충실하다"고 풀이했다.

양형기준에 관한 판결도 4건에 이른다. 김 전 대법관은 2005년에 내려진 '미국(United States) v. Booker' 판결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Booker판결은 연방양형기준을 의무적으로(mandatory)으로 적용하도록 하고, 의무적인 적용여부를 항소사유로 삼은 두 법률의 규정을 미국 헌법 수정 6조의 배심재판규정에 어긋나는 "삭제되어야 할" 위헌규정으로 선언하고, 연방의 양형기준이 권고적(advisory) 성격만을 갖게 한 판결인데, 그 법리를 명확히 하면서 정착시키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김 전 대법관에 따르면, 미 연방대법원이 2008년 회기에 선고한 사건들은 모두 민사 · 행정 · 민사소송 · 행정소송에 대한 법리를 선언하는 것으로, 상소(고)법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판결들이다.

◇파기법원=2008년 판결이 난 83건 중 약 80%인 66건이 파기판결이다. 하급심판결을 확정시킨 판결은 13건에 불과하다. 특히 상고기각 판결 중 대법관 전원일치의 판결은 5건에 불과하고, 8건은 소수의견이 있는 판결이다. 김 전 대법관은 "이 통계는 미 연방대법원이 파기법원임을 말하는 것"이라며, "우리 대법원 판결의 약 95%가 상고기각판결인 점과 크게 대비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상고기각의 경우, 공연한 희망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체념하고 본래의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을, 당사자에게는 시간과 노력과 돈을 더 쓰게 하고, 법원에게는 인력을 낭비하게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며, "상고법원은 기본적으로 파기법원이어야 하고, 상고심을 개혁할 때에는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또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대법원에서 상고기각판결을 받을 권리라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대법관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의 견해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김 전 대법관은 또 "상고심의 주된 의무는 하급심의 개별적인 잘못을 시정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개별적인 잘못을 시정하는 일은 항소심에서 할 일이고, 상고심의 경정기능은 더 넓고 체계적이다. 법과 사회의 간극을 교량(橋梁)하는 일이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일이다"라고 갈파한 아하론 바락(Aharon Barak) 이스라엘 대법원장의 말을 인용하며, 미 연방대법원 만큼 바락의 말을 실증적으로 실천하는 역사도 드물다고 평가했다. 미 연방대법원이 하급심의 잘못을 고치는 상소법원으로 창설되었으나, 사법역사가 발전하면서, 행정부 · 의회와 대등한 입장에서 권력을 나누고,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며 헌법을 수호하는 상고심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 연방대법관의 고령화=미 연방대법원이 생긴 1789년부터 1970년까지 미 연방대법관의 평균 재임기간은 14.9년이었으나, 1970년부터 2006년 사이의 평균 재임기간은 26.1년이었다. 또 1789년부터 1940년 사이 대법관의 퇴직 당시 평균연령이 58.3세에서 72.2세로 늘더니, 1970년 이후로는 78.7세로 고령화가 가속되고 있다. 고령화는 여러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건강 때문에 일을 감당할 수 없는데도 대법관직을 유지하고, 때로는 판단을 그르치기도 하는데, 그런 판단으로 다수와 소수의견이 갈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김 전 대법관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미국의 학자와 실무가들 사이에선 종신제의 폐지와 임기제 도입 등 여러 제안과 함께 임기제가 도입되면 사법부 독립이 훼손될 수 있다는 비판 등이 나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와 함께 이 책엔 마무리 되어가는 미국의 양형기준표, 사법과오와 사과의 문제, 법정에 카메라를 들여놓는 문제, 판사들의 의견 표명, 보통법과 시민법의 차이 등 놓치기 아까운 사법에 관한 여러 이슈가 김 전 대법관의 깊이있는 통찰과 정제된 표현으로 담담하게 서술돼 있다.

김 전 대법관은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국민들이 법원에 대하여 가지는 인식이 크게 변한 것 같지 않다"며, "그러나 한국 사법은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있다"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소회를 밝혔다. 세계의 사법 환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어, 어느 나라든 창조적인 법질서의 구축이 요구되는데, 우리는 인적 물적으로 그 도전을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란다.

누름돌에서 펴 낸 이 책의 분량은 본문 216쪽, 비매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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